88page
88page
충북 제천(堤川) 사람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부위(副尉)로 근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분연히 귀향하였다. 고향에서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1919년 1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합정부로서의 조직을 갖추고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의 취임식을 갖게 되자 이에 참석하면서부터 임시정부와 연관을 맺었다. 이에 그는 임시정부 국내조사원에 임명되어 충북 제천지방의 조사를 담당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에 선출되었다. 1920년 2월 군무부 비서국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의정원 군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동년 9월에 사임하였다. 그후 북경(北京)으로 가서 신 숙(申肅) 신달모(申達模) 등과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고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를 개최하여 박용만(朴容萬) 김천호(金天浩) 강구우(姜九禹) 송 호(宋虎) 이장호(李章浩) 남공선(南公善) 김 갑(金甲) 등과 무력 항쟁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를 공박하기도 하였다. 1923년 3월에는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을 목표로 조직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조 곤(趙坤) 김 정(金政) 등과 통상회원으로 입회하였다가, 1926년 3월에 특별회원이 되었다. 1924년 7월에는 상해에서 개최되고 있던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만주로 옮겨 가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였으며, 중앙집행위원장 김 혁 등 간부들이 일경에게 체포된 뒤 동년 7월 신민부가 재개편될 때, 그는 참모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항일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는 중국측과 교섭하여 신민부 관할 하의 지방자치를 승인 받았으며, 중국구국군과 한 중연합군을 조직하여 토일군(討日軍)으로 전투에 참여하였다. 1928년 그는 김좌진이 겸하고 있던 군사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동년 9월 재만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가 길림(吉林) 근방 신안둔(新安屯)에서 3부통합(三府統合)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그는 김좌진 김종진(金宗鎭) 여호림(呂虎林) 등과 함께 신민부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각기 의견의 차이를 보여 3부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동년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의 2개 단체가 새로 구성되었는데 그는 김동삼(金東三)을 의장으로 하는 혁신의회의 군사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30년 2월 상해에서 홍 진(洪震)이 파견되어 오자 그는 이청천(李靑天) 신 숙(申肅) 이장녕(李章寧) 등과 협의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 직속으로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독립군 전투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당시의 군세는 1만 5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간부들이 길림(吉林)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일 군경의 습격을 받고 많은 간부들이 붙잡혔으며, 김동삼(金東三)은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포위망을 벗어난 그와 이청천 등은 북만주에서 당세를 확대, 1931년 이후 일제의 만주침략에 따라 항일전을 계속하였으며, 1932년 11월에 한국독립당 중앙당 대회에서 그는 한국독립군의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토벌하게 되었는데 사도하자(四道河子), 동경성(東京城),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에서 전사에 빛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를 석권하여 더 이상 독립군의 존립이 어려워지게 되자 그는 이청천 등과 함께 혈전을 거듭하던 만주를 떠나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그는 남경(南京)에서 이청천(李靑天) 유동열(柳東說) 최동오(崔東旿) 현익철(玄益哲)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 참가하였으며, 1938년 5월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3당통합회의가 개최되자 이청천 유동열 최동오 김학규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 대표로 참석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는데 기여하였다. 1938년 7월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에 임명되어 나태섭(羅泰燮)과 같이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 파견되었으며, 1939년 10월에는 다시 임시의정원 충청도 선출 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동년 11월에는 조성환(曺成煥) 이준식(李俊植) 왕중량(王仲良) 등 군사위원과 장교 18명을 대동하는 화북(華北)지구에 파견되어 병사모집, 군사훈련 등을 시작하였다. 1940년 9월 중경(重慶) 가능강(嘉陵江)가의 가능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韓國光復軍 成立典禮式)이 거행되어 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광복군사령부 부관장(副官長)에 임명되었다가 동년 10월에는 서안(西安)에서 총사령대리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고, 1943년 3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생계부장(生計部長)에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