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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⑳ 85 인지 요즘은 업체 규모가 점차 줄어들고 있네요. 홀 어머니 밑에서 저도, 아우도,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아우는 서울에서 아무개 은행지점장으로 명예퇴직 후 밥걱정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저도 은행 돈 빌 리지 않고 지금의 업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지난 날 처절했던, 뼈저린 가난 때문에 이제는 우리 형제 가 세 끼 밥걱정하지 않고 사나봅니다. 그런데 사업 을 하면서 체득한 것은 ‘독립운동가 유족이란 걸 꺼 내지 않는 게 낫다’는 겁니다. 독립운동가 유족이라 고 하면, 될 일도 안 되더군요. 거래처 사람에게 독립 운동가 후손이라고 말하면, ‘존경합니다’라고 겉으 로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상대하기 껄끄럽다, 만만 치 않겠다고 생각하는지, 될 일도 안 되더군요. 게다 가 행동에 제약도 많이 받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동 안 우리나라 정계, 재계, 학계 등은 온통 친일파 후손 들이 주류 아닙니까?” 그러면서 나에게 명함을 건네주는데, ‘광복산업주 식회사 대표이사 김복현’이었다. 내가 상호에 ‘광복’ 이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하자, 사업 시작 때는 뭘 모 르고 넣었는데, 곧 사업에 도움이 안 되는 걸 알았다 고 한다. 하지만 이미 등록한 상호를 바꿀 수 없었다 고 하면서 멋쩍게 싱긋 웃었다. 몇 해 전, 부인이 세상을 떠나 청주에서는 혼자 살 고 있다고 했다. 주말에는 서울 자녀들 집에서 그들 과 함께 지낸다고 하면서, 슬하에 남매를 두었다고 하였다. 두 분 할아버지 출생지에다가 동상이라도 세우려 하지만, 그 일이 쉽지 않다고 하였다. 귀담아 들어보니 유족이 부담해야 할 돈 때문인 듯했다. 나 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라면, 유족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나라에서 동상을 세워주는 게 도리가 아 니냐고 반문했다. 김원국 할아버지는 다행히 국립묘지에 안장했으 나, 김원범 작은 할아버지는 시신을 찾지 못해 여태 안장치 못했다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김원범 작은 할아버님은 미혼으로 순국하여 후손이 없기에 아우 (김복열)가 출계(양자로 감)하여 제사를 모신다고 하 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새 호남으로 가는 고 속버스시간이 됐다. 김 선생은 굳이 버스 승차장까 지 따라 나와 내가 탄 버스가 떠날 때까지 승강장을 지키며 손을 흔들었다. [김원국 의병장 행장] 김원국(金元國, 元局, 또는 昌燮) 의병장은 1873년 전남 광주시 당부면 북촌리에서 출생하였다. 1905 년 9월 광산 송정읍에서 일군을 타살하고 피신하였 다. 1906년 3월, 아우 원범(元範)과 함께 광주 무등촌 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교전을 하였다. 1907 년 9월, 호남 의진의 우두머리인 기삼연(奇參衍)과 김태원이 합진하여 그 일대에서 성세를 이루게 되 자, 그해 12월 김태원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 다. 이때 부하 삼백 여 명으로 광주 수비대와 교전하 여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1월, 기삼연과 김태원이 순국하여 일시 호 남 의진의 기세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으나 김태원 휘하 부장들이 각기 의병장이 되어 그 의진을 재편 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오성 술· 조경환· 전해산 등이 있었다. 김원국은 이즈음 함 평의 적량면 · 여황면 · 오산면 등지에서 일군과 접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