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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면 적곡리, 수산리 주민들에게 물어보아도 불꽃모양의 애국지사 묘소 안내판을 주민들도 본적이 없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서 다음 탐방지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의 후군(後軍) 장수로 충북 제천(堤川)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일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한국을 보호국화 하기 위해 침략정책을 강화하여 갔다. 그러나 극동에 진출해 있던 러시아를 비롯한 독일·프랑스의 개입을 초래하여 일본은 그 지휘가 약화되었다. 이에 일제는 세력 만회를 위하여 1985년 8월 국모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친일세력을 부식한 일제는 그해 11월 을미개혁(乙未改革)을 단행하면서 식민지화를 재촉하여 갔다. 이러한 일제의 국모시해와 단발령·복제개혁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임도봉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일본의 침략에 비분강개하던 중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듬해 초 유인석 의진에 참여하였다. 유인석 의병진에서 그는 후군에 참여하여 장수(將帥)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다가 제천에 회집하여 있었는데, 이 때 남한산성 의병 진영을 함락시킨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의 관군들이 일본군과 함께 제천으로 몰려왔다. 당시 장기렴의 관군이 가흥(佳興)에 도착한 것은 4월 23일의 일이었는데, 그 후 한 달 동안 관군 및 일본군과 의병 사이에 협상이 오간 후 5월 23일부터 대접전이 벌어졌다. 제천의 대회전은 폭우가 쏟아지는 속에 밤낮없이 4일간 지속되었다. 이사이 강원도 평창군 출신의 의병장 나시운(羅時雲)이 가흥(佳興) 전투에서 전사하고, 후군진 장수인 그를 비롯하여 채동집(蔡東集)·홍귀봉(洪貴鳳)은 광동(廣東)에서 독곡(獨谷)으로 들어오는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그리하여 독곡전투에서 적을 막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3인을 후군 삼의사(後軍 三義士)라고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