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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⑳ 83 는데, 이는 할아버지가 왜놈 순사에게 취조 중 가명 과 거짓 주소를 말한 게 계속 그렇게 쭉 전해 온 탓으 로 여겨집니다. 그 생가 터는 그때(일제강점기) 일본 군에게 몰수되어 비행장으로 사용돼 오다가 현재는 5·18 공원이 조성된 바, 그곳에 할아버지 형제 동상 을 세우고 싶습니다.” - 광주 태생이 어떻게 청주에서 자리를 잡았습니 까? “그 이야기는 좀 깁니다. 제가 집안 형편이 여의 치 못해 뒤늦게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재학 중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학도의용군으로 군 에 입대하여 상경하게 되었고, 그 이후 전투경찰에 도 입문하였습니다. 군 복무 중에는 야간대학(건국 대학교)에 적을 두기도 했습니다. 제대 후, 서울에서 살다가 사업 때문에 청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요약 을 하면 사업하던 친구 때문에 서울 논현동에서 살 다가 이곳으로 오게 된 셈이지요. 이곳에 온 지 그새 30년이 넘었네요. 이제는 청주가 제2의 고향이 됐 습니다.” - 의병장 후손으로 살아온 얘기 좀 들려주십시 오. “저희 어머니와 제 동생, 세 식구가 한 마디로 거지 처럼 살았지요. 아니 진짜 거지였습니다. 더 이상 말 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의병 후손이 자랑스 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려면 자식을 낳지 말라’고 말합니다. 저는 제 자식 이 독립운동을 한다면 극구 말리겠습니다. 물론 권 유도 하지 않고요.” 당시 77세인 김복현 선생은 살아온 70 평생을 회 고조차 하기 괴로운 듯 곧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 다. 얼마나 의병 후손으로 살아온 당신 삶이 고달팠 으면 그러실까? 한창 점심시간으로 밥집에는 밀려들 어오는 손님과 소음으로 더 이상 대담이 어려워 얼 른 밥을 다 먹고 밖으로 나왔다. 조용한 찻집을 찾았 으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보이지 않는다’는 발처럼 그 흔한 커피집이 그 일대는 눈에 띄지 않았다. 김원국 의병장 손자 김복현 선생(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