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page
82 2025년 8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침략을 막아내느라 목숨을 바치면서 산화하지만, 아 낙네들은 전리품으로 사로잡혀 전장에서, 이국에 끌 려가서도 성노리개로 지내다가 귀신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늙거나 병든 뒤 고국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우리나라에서는 '환향녀(還鄕女)' 곧 ‘화냥년’이라는 비속어로 하여, 평생 그 멍에를 지 고 사는 이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피로써 맺은 혈맹의 전우 이번 호남의병 전적지를 답사 순례하면서 이 『남 한폭도대토벌 기념사진첩』에 수록된 의병장들의 후 손들은 남다른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느꼈 다. 그분 선조들은 의진(義陣)에서, 혹은 감옥에서 피 로써 맺은 혈맹의 전우들이 아닌가. 서로가 상대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문경지교(刎頸之交, 목을 베어도 아깝지 않은 사귐)이었으리라. 이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는 오성술 의병장이 다. 나의 호남의병 전적지 답사 취재를 마칠 즈음, 그 분 후손인 오용진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사 연인 즉, 아주 귀한 의병장 형제분을 빠트렸다면서 꼭 추가 답사를 부탁했다. 그 어른(오성술)의 추천을 받은 뒤 기록을 살펴보 니까 의병장으로 흠결이 보이지 않았고, 나의 호남 의병 답사에 고문 역을 맡아주신 순천대 홍영기 교 수도 이미 추천한 분이라 전북지방 답사를 일단 마 친 뒤 추가 답사하기로 하였다. 김원국 의병장 후손 김복현 선생은 청주에 거주하 고 있었다. 마침 전북지방 답사로 정읍 가는 길에 청 주에 들렀다. 이른 아침, 내가 사는 안흥에서 원주로 가서 청주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버스기사에게 도착 예정시간을 물어 후손 김복현 선생에게 전화로 도 착 시간을 알리자, 그 시간에 맞춰 청주터미널에서 대 기하고 있었다. 서로 생면부지로 얼굴도 몰랐지만 손 전화 덕분으로 우리는 쉬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터미널에서 가까운 밥집으로 가서 갈 치조림 백반을 들면서 말문을 열었다. “한 마디로 거지였습니다” - 가족들의 수난사를 들려주십시오. “일제 강점기에 할아버님(김원국)은 1910년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셨고, 아우이신 작은 할아버님(김원 범)은 1909년 2월 광주 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돼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스스로 혀 를 끊어 23세 나이로 자결 순국하셨습니다. 저는 제 아버님 얼굴도 모릅니다.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아 버님도 왜놈에게 강제 연행되어 군사 비행장 노역 중 공사장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집안에 남자 는 모조리 왜놈 총칼에 희생되니 저희 어머니는 대 역죄인이 된 양, 일체 그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제 가 물어도 함구령을 내리면서 누가 물어도 묵묵부답 이었습니다. 왜정 치하에서 저희 가족들은 독립운동 을 한 ‘수괴’의 가족들이라고 하여 재산도 몰수되고, 우리 식구들은 전남 보성군 바닷가 허허벌판에 강제 이주 당하여 거기서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거기 서 살다가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다시 광주로 와 살았 지요.” - 할아버지 생가는 어딥니까? “광산군(지금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리 134입니 다. 다른 문헌에는 광주시 당부면 북촌리로 나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