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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⑲ 79 본 대로, 기록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쓰면 될 게 아니냐?”라고 조언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보 니 명답인데다가, 문득 은사 조지훈 선생 「지조론」을 강의시간에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 냄 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高節) 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 면 그 후반을 보라” 정읍에서 돌아온 지 사흘 후, 산내면 종성리 송희 정 씨가 약속대로 회문산 정상 외진 곳에 있는 임병 찬 의병장 무덤 사진을 메일로 보내왔다. 내가 고맙 다고 전화를 하자 후손들이 산소를 돌보지 않아 무 덤이 많이 우거진 것 같단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다시 거의할 것을 꾀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 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널리 격문을 발송하고 동지를 모으는 한편, 그 조직 을 확대시켜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 순무 대장에 임명되었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이인순 등과 상 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은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 한일병탄 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 도 일제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내쫓으려는 항일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일본 경찰에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옥중에서 계획이 실패했음을 분 개하고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뒤 6 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6 년 5월 23일에 유배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45년 경북 구미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30여 년 교사생활과 함께 작가, 시민기자로 지냈다. 지금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 밑에서 창작일에 전념하 고 있으며 광복회 고문을 맡고 있다. 작품으로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 · 『허형식 장군』, 산문집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 『항일유적답사기』 · 『누가 이 나라를 지켰 을 까』 · 『영웅 안중근』 · 『대한민국 대통령』 등이 있다. 이밖에도 사진집 『나를 울린 한국 전쟁 100장면』 · 『개화기와 대한 제국』 · 『일제강점기』 · 『미군정 3년사』 ·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등과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 『평화와 인권의 대통령, 김대중』 등이 있다. 필자 박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