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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5년 8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1872년으로 나와 있음에도 잘못된 정보가 돌아다니 고 있습니다. 또한 할머니는 김해 김씨가 아니라 전 주(全州) 김씨지요. 무엇보다도 할머니에 대한 가장 큰 오류는 ‘기생 출신으로 하상기의 첩이 됐다는 설 (說)’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평남 안주(安州)에서 무 역업을 하던 아버지 김병훈과 어머니 이씨 밑에서 풍 족한 생활을 누렸던 교양있는 분이셨습니다. 결혼 역 시 하상기의 전처인 조씨 부인의 사망으로 이뤄진 것입니다”라며 항간의 일부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 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김란사 지사의 손 자 김용택 회장의 각고의 노력으로 국가보훈부 독 립유공자 공적 조서에도 출생연월일이 바로잡혔고 (1872.9.1~1919.3.10) 2018년에는 하란사에서 ‘김 란사’로의 본명 수정도 이뤄졌다. 1906년, 김란사 지사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 하여 이화학당 교사 겸 기숙사 사감으로 취임했다. 기숙사생들에게 오는 편지를 일일이 검열할 정도로 엄격했으며 학생들이 교육에 전념하도록 지도했다. 이때 김란사 지사는 덕수궁에도 드나들며 고종황제 와 엄비(嚴妃)의 자문에 응했는데 고종은 김란 사 지 사에게 궁중 패물을 군자금으로 주어 의친왕과 함께 나라밖 일을 착수하도록 계획했다. 또한, 한일의정 서, 을사늑약, 강제병합조약 등의 원문과 외국의원들 에게 보낼 호소문을 작성하여 김란사 지사를 파리강 화회의에 보내 윌슨대통령에게 한국의 입장을 알리 려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여기자인 최은희 씨는 이때 일을 두고 “궁중의 발표가 있기 전 김란사가 고종황제의 국상 을 먼저 알고 비밀리에 소식을 전한 것을 보면 의친 왕을 통해 독립운동가들끼리 긴밀한 연락을 하며 크 게 활약한 것임에 틀림없다” 라며 당시 신흥우 박사 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김란사 지 사는 교육현장뿐 아니라 여류 연사로서도 특출하였 다. 1907년 진명학교 주최로 열린 집회에서 여성교 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자혜부인 회에서 주최한 집회에서는 김윤식·유길준 등 당대의 이름난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설을 했다. 또한, 1910년 신흥우 박사와 함께 미국에서 열린 감 리교 집회에 우리나라 여성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뒤 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을 소개 하는 연설을 했으며, 강연료로 받은 돈으로 당시에는 귀중한 풍금을 이화학당에 희사하였다. 그리고 안창 호(安昌浩) 선생 등의 협조로, 1918년에 모금을 통해 국내 최초로 정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기 도 하였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 가던 도중 베이징에서 급서(急逝) 한편, 김란사 지사는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 ‘조 일제문서에 기록된 김란사 동향(1917.9.19, 왼쪽). 하상기의 처로 기재 된 김란사 지사 호적등본(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