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page

78 2025년 7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궁금한 점을 물었다. 김완규 씨의 말에 따르면, 차경 석 교주는 원래 동학교도였고, 보천교는 민족 종교 로서 한창 때는 신도가 100만을 헤아릴 정도로 성행 했고, 신도들의 성금을 ‘독립적립금’이라는 명목으 로 걷어 실제로 대부분 독립자금에 쓰였다는 이야기 를 하였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가 ‘보천교’이야기만 꺼내면 할아버지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 까닭은 할 아버지가 한때 보천교에 빠져 집안 재산을 몽땅 심 지어 선산까지 보천교 교단에 다 갖다 바쳐 살림이 기울어졌다고 원망하는 잔소리 때문이었다. 워낙 여 러 번 들어 귀에 익은 바, 그 보천교의 실체를 그제야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이다. 송희정 씨가 접대하는 향 좋은 녹차를 그윽하게 마시고 그의 배웅을 받으며 종성리 마을을 떠나오는 데, 마침 당신이 임병찬 장군 묘지 사진이 어디 있을 거라며 찾아서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정읍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완규 기사는 내가 미처 몰라 부탁하지도 않은 칠보면 무성리 무성서원(武城 書院)에 내려주었다. 이 무성서원은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병오(1906)년에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 장군이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적지였다. 잠시 그곳 서원을 둘러보고는 귀가 길에 올랐다. 다행히 이번 답사 길은 나에게 할아버지 젊은 날 행적의 의문을 풀어주는 소득을 덤으로 얻었다. 집 떠나온 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이상하게 국내 답사 는 나흘만 지나면 더 이상 다니기가 싫어졌다. 내가 사는 강원도 횡성 안흥 산골까지 가려면 최소한 차 를 네 번은 갈아타야 이를 수 있다. 김 기사는 정읍시외버스정류장에 나를 내려주는 데 그새 택시비가 7만여 원 넘게 나왔다. 내가 택시 미터 요금대로 지불하자 그는 굳이 5만원만 받았다. 사람을 보려면 그 후반을 보라 정읍 임병찬 의병장 답사 후 글쓰기가 힘들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글에 따르는 책임 때문이었다. 임 병찬이 동학의 김개남 장군을 전라관찰사에 밀고하 여 체포케 한 전력 때문이다. 솔직히 이런 사실을 사 전에 알았다면, 아마 임병찬 의병장 전적지를 들르 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답사를 이미 끝낸 뒤 글을 쓰지 않는 것, 또한 옳지 않은 일이 아닌가. 이번 답사를 도와주신 몇 분에게 자문을 구하자, 그분들 역시 양론이라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혼자 며칠째 끙끙 앓고 있으니까 아내가 그 영문을 물었다. 사실대로 얘기하자, “뭘 고민하느냐? 당신이 무성서원에 세워진 ‘병오창의기적비 (丙午倡義紀蹟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