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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며, 전주를 점거하고 여세를 몰아 나주성을 차지하고자 서성문으로 들이 닥쳤으나, 관군의 무기에 패전하여 어등산에서 해산하였다. 수탈에 견디지 못한 농민이 대거 동학군 대열에 합세하니 동학농민군의 숫자가 앉으면 竹山이요, 서면 白山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많았다. 이에 전라도 오십삼개 고을에 집강소를 개설 운영하였다. 청군에게 지원 요청하자, 일본군도 청일간 맺은 천진조약에 의거 조선에 진군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一八九四년 六月二十一日(음력) 밤에 불법으로 경복궁을 점거하는 전투를 벌리자 고종이 항복하고 말았다.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더더욱 진압군 지휘권을 일본군에게 넘기게 되자, 일본군은 관군을 지휘하며 반일운동하는 동학 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선비복장에 검을 차고 다니는 나공을 체포하고자 고향 택촌마을을 덮쳤으나, 이미 나공은 함평 연암리로 숨어들었으며, 관군이 연암리를 추적 체포하려 했으나 함평 지곡리 동서댁으로 숨어 체포되지 않았다 . 이에 일본군은 나공의 부인 진주정씨를 체포하여 온갖 고문을 하며 나공의 숨은 곳을 실토케 했으나, 죽음으로 함구함으로 일본군도 마침내 입이 무거운 부인을 칭찬하며 풀어주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나공의 義와 부인 진주정씨의 烈을 기리고자 一九七二年부터 一九七四年까지 의열각을 건립하였는데, 그후 五十年만인 二○二二年에 최시형이 발급한 나공 위촉장 등이 발견되고, 일본의 양심있는 지식인이 성금을 내어 일본군 일본군이 저지른 악행에 사죄의 비를 건립하고 二○二三年十月 三十日 나주시민의 날을 맞아 제막식을 거행하고, 이어서 나공의 행적비를 개수하여 제막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