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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삼엄한 경계 뚫은 배화인의 나라사랑 “소은숙” 71 까지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이번(2018) 제73돌 광복절을 맞아 98년 전 배화 여학교(현, 배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던 이 학교 6명 의 소녀들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 기쁩니다. 배화 여학교의 독립운동은 3 · 1만세운동 1주년 때인 1920 년 3월 1일 일어났습니다. 당시 배화여학교에는 독 립정신이 투철하신 남궁 억(1863~1939, 1977년 독 립장), 김응집(1897~1937, 2008년 건국포장), 차미 리사(1880~1955, 2002년 애족장)와 같은 민족의식 이 강한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배화여자고등학교 오세훈 교장 선생의 이야 기다. 필자는 2018년 9월 12일(수) 낮 3시, 배화여학 교(배화학당)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취재하기 위해 학 교를 찾았는데, 당시 오세훈 교장(2025년 현재는 노 남희 교장) 선생은 필자를 만세운동 독립운동 자료실 로 안내했다. 이 학교 자료실에는 벽면 가득히 만세운동 당시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유리 진열대 속에는 졸업 장 등 당시 학생들의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배화여학교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이 아니 라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에 일어났다. 그렇 다고 이 학교 여학생들이 1919년 3월 1일에 침묵하 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국적인 거사날인 3월 1일 을 이틀 앞둔 2월 27일 밤, 기숙사생들이 잠든 사이  배화학당의 학생 대표인 김정애, 김해라, 최은심 등 은 식당에 모여 거사날에 전교생을 동원할 방법을 모 의했다. 이에 앞서 김정애는 당시 여학생의 연락본부 인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등사한 독립선언문을 두 번 에 나누어 가져와 배화학당에 몰래 숨겨두었다.  독립 선언문의 일부는 배화학당에서 쓸 것이고 일부는 거 사날 시내 시위에서 쓰려고 준비해놓은 것이었다. 이 들은 2월 27일과 28일 밤, 기숙사 뒤편 철망을 넘어  시내 상가에 선언문을 미리 배포해 놓고 3월 1일을  기다렸다. 그러나 거사날인 3월 1일에는 정작 만세 운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당시 스미스 교장 선생은 만세운동으로 학생들이  잡혀갈 것을 우려해 학생들이 모이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다. 거기다가 이날 오후에 일본 경찰이 들이닥 쳐 만세시위 사전 주모학생들을 조사하는 바람에 배 화여학교는 1919년 3 · 1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20년 3 · 1운동 1주년 시위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배화여학교에는 당시 남궁 억, 김응집, 차 미리사와 같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교사들이 학생들 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들은 상해(上海) 대한민국임 시정부의 소식 등을 전하며 “썩은 줄과 같은 일본 정 책을 끊고 일어서라”는 격문을 지어 학생들에게 용 기와 희망을 주었다. 특히 차미리사 선생은 “살되, 네  소은숙 지사 수형자기록카드 앞면(17살, 서대문형무소에서 1920년  4월 5일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