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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 • 광복회 조직 67 일제는 통고문 수령자의 주소와 의연금 요구액이  자산 정도에 비례한다는 점에 주목해 통고문이 가장  많이 발견된 충청도 지역을 주목했고, 1918년 1월  김한종 · 김경태 · 장두환 등 충청도지부원이 체포되었 다. 이후 박상진 · 채기중 · 임봉주 · 이관구 등 주요 인 물들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광복회원은 32명이 기소 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김경태 · 김한 종 · 박상진 · 채기중은 사형 순국했으며, 장두환은 옥 중 순국하였다. 체포를 피한 광복회원들은 해외로 피신하거나 국 내에서 은신하면서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1919년 3 · 1운동 후 국내에서 비밀결사들이 조직되 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우재룡은 1919년 6월 권영 만 · 안종운 · 소진형 · 이재환 등과 충청도 일원에서 활 동을 재개했으며, 1920년 6월 임시정부와 연계해 주 비단을 조직했다. 한훈은 1920년 6월 조선독립군사 령부(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하고 조선총독 및 일제고 관 암살을 추진했다. 광복회의 역사적 의의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 통치로 인해 한계에 부딪혔다. 또한 국내독립운동  단체들도 복벽주의와 공화주의 계열로 나뉘어져 이 념과 투쟁노선을 달리했다. 광복회는 이러한 한계 를 극복하고 조직되었다. 한말 의병전쟁계열과 계몽 운동 계열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과제 아래 통합했던  것이다.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단체로는 유일 하게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만주와 국내외에 활동  거점을 설치했다. 식민지배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 을 처단해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고 독립군 양성을  통한 독립전쟁을 추진했다. 광복회는 한말 국권회복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1910년 독립운동을 선도함 으로써 민족적 역량이 3 · 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으며, 1920년대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➊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2024년  8월 15일 광복회 사령관을 지낸 울 산 출신 독립운동가 ‘고헌 박상진 의 사 동상 제막식’이 울산시 달동 문화 공원에서 열렸다(『울산신문』 제공) ➋  충남 예산군 광시면에 있는 김한 종 생가와 사당, 기념관(오른쪽, 예산 사람 가윤 제공) ➌  박상진 의사 동상(가운데)은 1982 년 울산청년회의소가 울산시 옥교동  제이시(JC) 동산에 건립했다. 이후  1998년 북정공원으로 옮겼으나, 북 정공원이 재개발되면서 2017년 임 시 보관에 들어갔다. 그러나 재개발  공사기간이 연장되면서 제자리를 찾 지 못한 채 7년간 창고에 보관되다 가 이날 달동 문화공원에 다시 세워 졌다.  ➊ ➋ 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