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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2025년 7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7월의 독립운동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회는 1917년 음력 6월부터 전국의 부호를 대 상으로 의연금 모집도 추진했다. 전국의 자산가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애국심’에 호소해 자발적 으로 제공하는 의연금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 해 전국의 광복회원들이 지역의 자산가를 조사하고,  조사된 자산가들에게 광복회 명의의 통고문을 발송 하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에 의연금을 모금했다. 통고문 발송은 치밀하게 추진되었다. 자산가 명단 은 소금물로 작성했다. 소금물로 문서를 작성하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으나 불을 쬐어야만 글씨가 보이 는 점을 이용했다. 광복회원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 하기 위해 ‘광부 한명을 얻었다’, ‘금광 1개소를 발견 했다’와 같은 은어(隱語)를 사용했다. 이는 ‘광복회원  1명을 입회시켰다’, ‘자금 조달할 회원 1명을 찾았 다’라는 뜻이었다.  통고문에는 광복회 명의의 인장을 날인하고 이를  절반으로 잘라 한쪽을 통고문에 첨부하고, 다른 한 쪽을 광복회원이 자금 수령 시에 제시해 광복회원임 을 증명하였다. 이처럼 치밀한 방식으로 의연금 모 금이 진행되었다. 광복회 통고문 발송은 본부와 지부에서 추진되었 다. 본부에서는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의 자산가에게  「포고문」을 발송했다. 포고문 발송은 중국 단둥과 신 의주 등 국내외에서 이루어졌다. 포고문을 한곳에서  발송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였다. 경상도 지부에서는 「경고문」, 충청도 지부에서 는 「고시문」, 황해도 지부에서는 「배일파」라는 통고 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광복회의 의연금 모집은 접 수자들의 일제 신고 등으로 인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 았지만,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이들이 군자금  모집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광복회는 의열투쟁도 전개했다. 총사령 박상진은  1916년 음력 6월(양력 7월), 중국 단둥에서 이관구 (李觀求)와 조선총독 처단 계획을 세웠으나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친일파 처단 또한 광복회의 주요 한 활동이었다. 전라도지부에서는 1917년 5월 서도 현을 처단했고, 경상도지부에서는 1917년 음력 9월 (11월 10일) 장승원을 처단했다. 충청도지부에서는  1918년 1월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했다. 광복회는  의열투쟁을 전개한 후 ‘나라를 광복하려 함은 하늘 과 사람의 뜻이니 큰 죄를 꾸짖어 우리 동포에게 경 계하노라(曰維光復 天人是符 聲此大罪 戒我同胞), 경 계하는 이 광복회원(聲戒人 光復會員)’이라 기록한  사형선고문을 붙였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친일파를  처단했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광복회의 와해와 계승단체 광복회는 1918년 1월부터 회원들이 일제에 체포 되면서 와해되었다. 군자금 모집을 위해 발송한 통 고문과 의열투쟁은 광복회를 일제에 노출시켰다. 일 제는 1917년 10월 경부터 광복회의 존재를 파악했 다. 광복회에서 발송한 통고문이 발견되었고, 광복 회의 의열투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광복회원 체포에 집중했다. 무단통치가 실시되고 있 는 상황에서 국내에서 ‘광복’이라는 명칭을 사용하 는 단체가 조직되어 자금을 모집하고, 의열투쟁을  전개하며 자신들의 정체를 명백히 밝히고 있는 상황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