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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 • 광복회 조직 65 되어 설치되었다. 독립전쟁을 실현하기 위해 길림 에 사령부를 두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즉  길림광복회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만주본부였 으며, 황해도 의병장 이진룡이 부사령으로 임명되어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진룡이 운산금광에서 자금 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자 광복회는 1917년 김좌진 을 만주로 파견해 부사령의 책임을 맡겼다.  광복회는 전국에 지부도 설치했다. 조직목적을 실 현하기 위해서는 회원의 확보와 활동거점이 필요했 기 때문이다. 광복회 지부 중 충청도 · 경상도 · 전라 도 · 황해도 · 평안도 지부는 광복회 활동에 중심적 역 할을 담당했다. 광복회가 전국적인 활동을 할 수 있 었던 배경에는 해당 지역에 연고가 있는 지부원들의  역할이 컸다.  광복회는 국내외 상업조직으로 위장한 활동거점 도 설치했다.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점 (大東商店), 중국 단둥의 안동여관(安東旅館)과 삼달 양행(三達洋行), 장춘의 상원양행(尙元洋行) 등이 이 러한 기능을 수행한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영주에  설치된 대동상점은 광복회의 활동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길림광복회 조직비용을 조달했다. 이밖에도  예산 · 연기 · 인천 · 광주 · 삼척 등에 설치된 거점들 도 광 복회 활동의 주요 기반이었다. 광복회가 설치한 연 락거점은 회원들의 자산 출원으로 설치되고 운영되 었으며, 자금조달 및 지역 사업을 추진했다. 광복회의 활동 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에 주력했다. 창립목적을 실 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군자금 모집은 다양한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회원들 이 자신의 재산을 헌납하기도 했으며, 일본인 소유 의 광산을 공격하거나 중국지폐를 위조해 자금을 조 달하기도 했다. 지휘장 우재룡과 권영만은 1915년 12월 경주 광 명리에서 일제의 우편마차를 공격해 경주에서 대구 로 운송되던 세금 8천 7백원을 탈취하였다. 김진만 (金鎭萬) · 김진우(金鎭禹) · 박상진 · 임봉주(林鳳柱) · 정운 일(鄭雲馹) 등은 1916년 9월 대구부호 서우순을 상 대로 자금 모집을 추진했다. 일명 ‘대구권총사건’으 로 알려진 자금모집은 실패했고, 참여자 대부분이  박상진, 김한종 2인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20.9.11, 이상 국가보훈부 제공) 우재룡(1884~1955)김한종(1883~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