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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길용 선생 63 1년간 옥고 뒤 스포츠 전문기자로 활동 1921년에 풀려난 후 충남 대전에서 청년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8월 10일 대전청년 구락부 제3회 정기총회에서 문예부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대전청년회 문예 단 단장으로 10여 명의 단원과 함께 남부 지 방을 순회하며 각 지역 청년회와 교류하였으 며, 대전에서 「운강명월」이라는 극을 공연하 였다. 1923년 2월 대전소작인상조회(大田小作人 相助會) 총회에 대전물산장려회 회장으로 참 석하여 소작인들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열 변을 토하였다. 또한 그 해 3월 대전체육회 창립총회에서 서무 겸 연구부장으로 선출되 었다. 이 무렵 『동아일보』 대전지국 기자로 근무하였다. 1923년 인천으로 지역을 옮겨 청년운동을 지속하였다. 같은 해 9월 인천지역 배재학당 졸업생 모임인 인배회(仁培會) 회장으로 선출 되었다. 1924년 1월 제물포청년회(濟物浦靑 年會)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이 무렵 조 선청년총동맹 총회에 참석하여 집행위원으 로 선출되었다. 인천지역의 정구 경기에서 심판을 보고, 빙상경기대회 개최를 주도하여 스포츠 분야에서도 활동하였다. 또한 『동아 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활동하며, 1923년 8 월 굴업도(堀業島) 태풍 피해 당시 현장으로 출동하여 르포 기사를 전달하였으며, 이후에 도 각종 재난 현장에서 신속히 소식을 전하 였다. 1924년 『조선일보』로 옮겼으나, 1927년 다시 『동아일보』 기자로 복귀하였다. 이 무 렵 체육 전문기자로 활동하였다. 그 이유는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한국의 혼을 찾고자 한다면 체육을 중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 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 경기 현장을 취재 하면서 한국인 선수들의 활약상을 보도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또한 1927년 8월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함께 조선 운동기자단을 조직하여 스포츠보도 전문화 에 기여하였다. 조선청년대회 강제 해산장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24년 4월 26일자, 2면) 이길용의 ‘정치범 처벌령 위반’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 혐의 의 재판 판결문(1920.12.21, 국가기록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