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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단체가 바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이다. 즉, 일시적으로 침체 국면에 처했던 독립군 활동이 통군부 를 거쳐 다시 통의부의 깃발 아래 대동단결한 것이다. 통의부 소속 군대의 명칭은 ‘대한통의부의용 군(大韓統義府義勇軍)’이며, 그 임무는 남만주 지역에서 교육과 산업진흥 분야의 자치활동, 그리고 각종 무장투쟁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경신참변으로 무참히 학살당한 만주의 한인들> 통의부 의용군을 주축으로 만주에서의 독립전쟁이 활발히 진행된 것은 무엇보다도 3.1운동으로 인한 파급효과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좁은 의미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과 태화관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거족적 독립운동 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이후 1년여 동안 계속된 국내외의 항일 민족독립 운동을 총칭하는 말 이다. 이 운동은 지역과 계층, 종교와 이념, 남녀와 노소를 초월하여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항일투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를 출발시킨 ‘3.1혁명’으로도 간주되기 때문에 그 정치사 적 의미 또한 매우 크다. 3.1운동은 승승장구해오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뿐 아니라 중국, 인도 등 세계 민족해방투쟁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의 일대 쾌거였다. 하지만 평 화적 시위의 한계도 또한 분명히 드러났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일시에 들고 일어났다 할지라도 평 화적 시위만으로는 잔악한 일제를 물리칠 수 없었다. 이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상해나 만주로 망명 하여 이미 이주해 자리 잡고 있던 선각자들과 힘을 합쳤고, 이로써 보다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전 개하게 된다. 중국 상해를 중심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로 정치⋅외교적 노력에 힘을 기 울였다면, 만주를 비롯해 이미 수많은 조선인이 자리 잡고 있었던 중국과 러시아 각 지역에서는 독 립운동기지의 건설이 활발히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