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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여운형 선생 61 께 상하이에서 중국의 국공합작과 한국독립 운동의 연대, 한국 사회주의운동 세력의 통 합, 약소민족의 운동세력과 국제적 연대 등 을 골자로 하는 협약을 맺으며 한·중연대를 통한 민족운동을 구상해 갔다. 그는 국내 사 회주의자들과도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었 다. 그러던 중 1925년 12월에 조선공산당이 일제 당국에 발각되면서 김찬·김단야 등이 상하이로 망명해 오자, 이들과 함께 1926년 1월에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를 조직하였 다. 이 무렵 그는 광둥(廣東)과 상하이를 왕래 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26년 1월 광둥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 2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중국혁명에 대한 국민당의 사명’이라는 제하의 축사에 서 중국의 국민혁명이 약소민족의 해방과 직 결된다는 연설을 하였다. 또한 황포군관학교 교관 손두환의 주선으로 장제스(蔣介石)를 만 나 한국독립운동의 자금지원 및 한인 청년들 의 황포군관학교 입교문제 등을 교섭하여 일 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는 같은 해 2 월에 임시의정원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상해 파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1926년 2월에 는 ‘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무산운동과 민 족운동과의 연합을 표방하면서 사회주의운 동을 진작시켜 나갔다. 조선건국동맹·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해방에 대비 한편 순종(융희황제)이 승하하자, 이를 만 세운동의 절호의 기회로 삼아 조선공산당 임 시상해부가 6 · 10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할 때 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상하 이를 주무대로 활발한 항일투쟁을 벌이던 중, 1929년 7월 10일 상하이에서 일본영사 관 경찰에 붙잡혀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국 내로 압송되었다. 이후 대전형무소 등에서 3 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3년 중앙일보(이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 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6년 8 월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사장직 에서 물러났으며, 이로 인해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1940~1942년에 여러차례 도 쿄를 방문했던 그는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조선건국동맹을 조직 하여 조국광복을 준비하였다. 해방 직전인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1945년 8월 16일에 건국준비위원 회를 발족하였다. 1945년 11월에 조선인민 당을 조직하였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 원회 결렬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주력하였고, 10월에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다. 1947년 7 월 19일 차를 타고 가다가 서울 혜화동로터 리에서 암살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2005년에 대통령장, 2008년 에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