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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상재 선생 61 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이상재를 내부 대신으로 하는 공화정부를 수립하려는 계략 을 짜고 있다고 고발되었기 때문이다. 이른 바 ‘개혁당 사건’으로 15년형을 받아 한성감 옥소에 수감되었다. 이 때 기독교에 입교하 였으며, 2년 1개월 만인 1904년 5월 석방되 었다. 이후 황성기독청년회(YMCA) 교육부 장을 맡아 청년회 학관(學館)을 개설하고 국 권의 위기 앞에서 청년들에게 분발할 것을  호소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 로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일제 당국에 체 포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또 해외 에 있는 이승만에게 3 · 1운동 관련 자료를 비 밀리에 보내 해외 독립운동 세력들이 연대하 고, 국제외교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그의 본 격적 교육운동은 3 · 1운동 이후 조선교육협 회를 결성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 는 것으로 나타났다.   1923년 3월 29일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 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자, 의장으로 선출되어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조선에 대 학이 설립되어 인재양성과 민족 문화 창조  및 발전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면 서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모금 방해공작과 경성제국대학의 설 립 추진, 1923년부터 거듭된 수해와 가뭄 등 으로 인해 모금운동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1924년 9월 75세의 나이에 조선일보사 사 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조선일보사에는 사 회주의 사상 을 가진 기 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를  비판하고 혁 명적 방법으 로 민족해방  및 계급해방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1925 년 9월 8자 신문의 사설 「조선과 노서아(露西 亞,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를 문제삼아 『조 선일보』는 발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10만 추모객이 모인 ‘사회장’ 장례식 식민지 조선 민중의 신망을 받던 그는 건 강 악화로 병석에 누워있으면서도 신간회(新 幹會) 회장직을 수락하였다. 1927년 1월 20 일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민족단일당 건 설을 내걸고 좌우 합작하여 신간회의 창립  발기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해 3월 29일  78세를 일기로 재동 셋집에서 서거하였다. 4 월 7일 그를 추모하는 장례가 조선에서 처음 으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0만 여명에 달 하는 많은 추모객이 운집하였다. 묘를 처음 에는 한산 선영에 모셨으나 1957년 6월 경 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하여 부인  강릉유씨와 합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 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재 선생의 ‘사회장’ 모습(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