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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2025년 8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1919년 11월에는 ‘적국의 심 장부’인 일 본 도쿄를 방 문 하 여 일본 고위 관 료 들 을 상대로 한 국 독 립 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상하이를 무대로 활동 하면서 한인 교민사업에도 관여했는데, 인 성학교(仁成學校) 설립 이후 이 학교 교장으 로서 민족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1920년 여름 국제공산당 위원 보이친스 키가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상하이에서 한인 독립운동자 중 유력자회의를 개최하고자 할 때, 여운형은 김만겸을 통해 보이친스키와 회견을 가졌고, 이어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 다. 이때 고려공산당 입당은 독립 달성을 위 한 수단으로써 러시아공산당의 원조를 기대 한 때문이었 다. 1921년 이동휘와 결 별하고, 김만 겸이 주도한 이 르 쿠 츠 크 파와 고려공 산당 상해지 부에 참가했다. 같은 해에 중한호조사(中韓 互助社) 결성에 참가하여 한·중 양민족의 공 동 투쟁과 이해증진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 대회가 열릴 때 한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 석하여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다. 한·중 합작과 좌 · 우 연대 모색을 통한 폭넓은 독립운동 상하이로 돌아와서는 1922년 10월 독립운 동의 장기적 구도 아래 김구 등과 함께 한국 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 도 준비하였다. 한국노병회는 10년 동안 1만 명의 근로병 양성과 백만원 이상의 전비 확 보를 목표로 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의 재편 문제가 크게 부상하자, 안창호(安昌浩)와 함 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그는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였다. 1925년 1월 중·소협정이 체결될 무렵, 그 는 중국인 공산주의자 왕지에(王杰) 등과 함 상하이 공립인성소학교 제6회 졸업기념 사진을 찍은 여 운형(왼쪽 두번째, 1926.3.8) 몽양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여운형 장례식 사용 만장과  장례식 사진 전시 부분(이상 국가보훈부 제공) 경기도 양평에 세워진 몽양기념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