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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2025년 7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명되었다. 그 러나 그해 10 월 갑신정변 (甲申政變)에  참여한 홍영 식이 살해되 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 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하자 1887년 8월 7일 주미 외교서기관으로 발령이 났다.  1895년 3월 25일 학부 관제 개편에 이어  4월 1일 학부 조직이 발표되자 조병건 · 홍우 관과 함께 학부 편집국 참서관으로 임명되었 다. 이 시기 학부아문(學部衙門) 참의와 학부  참서관으로 근무하면서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였으며, 한성사범학교 관제, 외국어학 교 관제, 법관양성소 관제 등을 만들어 학교 를 설립하였고, 114명의 양반 출신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1895년 8월 박정양이 학부대신에서 내각  수반(총리대신)으로 임명되자, 『소학교령』을  발표한 데 이어 서울 소재 관립 소학교의 개 교를 목표로 교과서를 만들고, 교사를 초빙 하기도 하였다. 1895년 12월 1일에는 새로  설립된 관립외국어학교 교장도 겸직하면서  여러 나라와 교류 업무를 수행할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를 기르고자 교사 초빙에 노력하 였다.  독립협회, YMCA, 조선교육협회, 그리고 신간회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3일 후인 2월  14일 내각 개편에서 종2품 내각 총서에 임명 되었다. 이후 중추원 1등 의관(議官)을 거쳐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어 탐관오리와 부정부 패를 척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서 재필 ·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연설가로서 활약하였다. 정동구락부에 출입 하면서 개화파 인사나 외국인 선교사들과의  사교적인 모임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898년 10월에는 독립협회에서 의회설립 운동을 전개하면서 입헌군주제 실시를 핵심 으로 한 국정개혁안인 「헌의육조(獻議六條)」 를 왕에게 제출하였다. 「헌의육조」는 만민공 동회 토론회를 거쳐 정리한 것으로 그가 주도 적으로 진행하였다. 고종도 「헌의육조」에 동 의하여 중추원(中樞院) 장정 제정, 신문 발행,  상공학교 설립 등의 5개 사안을 더하여 국정 개혁방안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보수 관료 들이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제 를 수립하려 한다고 모함하자, 1898년 11월  4일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이승만 · 양홍묵 등이 경무청 앞에서 석 방을 주장하며 철야 시위를 벌이자 고종은 6 일 뒤에 이들을 석방하였다. 이 일로 1899년  1월 30일 의정부 총무국장 자리를 물러났다. 그후 1902년 6월 이원긍 · 유성준 · 김정식  등과 함께 일종의 비밀경찰조직인 경위원(警 衛院)에 구속되었다. 이유는 박정양을 대통령 이상재 생가 전경(충남 서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