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page


590page

성리학자이자 한말의병활동에 참여하였던 옥천 김구호(玉泉 金龜浩,1837~1903), 자는 기서(箕瑞), 호는 옥천(玉泉)이다. 두학동 장치미 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생애 대부분을 시곡리 방아다리 마을에서 살았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1212~1300)의 22대손이다. 영남의 유학자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1777~1861)에게 사사하였으며 퇴계 학맥으로 삼남 지방에서 처사(處士)로 불리었다. 1895년 한말 을미의병시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1842~1915) 휘하의 의병장 옥산 이정규(玉山 李正奎,1864~1945)의 참좌로서 활약하였으며 문집으로는‘상락가승’과‘옥천시첩’이 남아 전해진다. 주위에서 출사하도록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였으며 송학산 산록 옥천동에 은거하면서 향유로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후학중에는 국회의원을 지낸 자작동의 조종호(趙鍾昊,1921~2010), 조종승(趙鍾勝,1903~1970)등이며, 광산김씨 문중의 김용수(金龍洙)와 김영호(金永浩)는 진사시에 김필현(金弼鉉)은 알성시에 합격을 한 문하생이다. 공은 덕망높은 선비로써 평소 구휼애긍의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덕행을 실천하였다. 옥천동 계곡 너럭바위는 글씨를 쓰고 익혔던 곳으로 종이가 넉넉지 않아 갈잎에다 글자를 썼으며 그로 인하여 먹물이 계곡으로 흘러내려 냇물이 먹빛이었다 한다. 옥천계곡, 옥천길, 옥천교, 옥장고 등은 그의 호와 관련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에 유택이 있었으나 2021년 4월 제천시 고명동 진대골 종중 묘역으로 묘소를 옮김에 따라 남아있는 선생의 은거지이자 강학터였던 유적지를 보존하여 길이 전하고자 삼가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