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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여운형 선생 59 1917년부터 상하이(上海)로 무대를 옮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 하면서, 기관지 『우리들 소식』을 발행하였다. 이무렵 구미에 유학하려는 70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에게 유학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신한청년당 조직, 3 · 1운동 전개에 큰 공헌 1918년 8월 터키청년당을 모방한 신한청 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약했 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 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그는 텐진(天津)에 있 던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을 초빙하여 파 리강화회의 파견대표로 파견했다. 그리고 국 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 키기 위해 거족적 민족운동을 계획 추진했으 니, 그것이 3 · 1운동의 태동으로 구체화되었 다. 그는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하여 도쿄(東 京)의 2 · 8독립선언을 촉발케 했으며, 국내에 김철 · 선우혁(鮮于爀) 등을 파견하여 국내 인 사들과 접촉하게 하고, 자신은 북간도 · 시베 리아 방면으로 가 서 만세운동의 분 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이러한 그 의 노력은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 는 원동력이 되었 다. 그는 만주(중 국 동북지방)와 러 시아 연해주(沿海 州) 등지에서 독립 운동의 중앙 기관 을 상하이에 두어 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이동녕·조완구·조 성환 등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 무렵 독립운동의 통일적 조직형태를 강조했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같은 큰 조직형태보다 는 당(黨)에 의한 결합을 주장했다. 3 · 1운동 직후인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 원 의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도쿄를 방문한 여운형(뒷줄 왼쪽) 일행 1920년 4월 5일 열린 중국 남방의 장주(漳州)회의에 참가 한 여운형(왼쪽 두번째)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한 여운형(왼 쪽 두번째, 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