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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2025년 7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과 중국 내 인사 들의 가교 역할 을 하였다. 특히  1926년 12월 나 석주(羅錫疇)가  동양척식주식회 사와 식산은행 에 폭탄을 투척 하기 위해 서울 에 왔을 때 산파 원에 폭탄을 숨 겨주고 나석주 의 길잡이 역할 을 담당하였다. 1943년 홀로 셋방에서 살다 세상을 떠나다 남편 신채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27년이었다. 여사와 아들은 3·4일에 걸쳐  베이징으로 가는 도중 여관에서 쉬다가 납치 를 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여관 주인의 도움 으로 무사히 신채호를 만날 수 있었다. 세 가 족은 박숭병의 집에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냈 다. 하지만 신채호는 더 이상 가족과 함께 지 낼 수 없어 다시 여사와 수범을 국내로 돌려 보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1928년  4월경 신채호는 다른 곳에 다녀올 데가 있다 면서 편지를 하지 말라고 당부한 후 외국위 체(爲替) 위조사건으로 다이완 지륭항(基隆 港)에 도착하기 전 배 위에서 경찰에게 체포 되고 말았다. 그 후 감옥에 있는 신채호와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지만, 1931년부터는  편지마저 끊어져 버렸다. 결국 1936년 2월  관동형무소에서 아들 신수범 앞으로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 가 날아왔다. 이에 아들, 친구 서세충과 함께  뤼순(旅順)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부군 신채 호를 만났으나 전혀 의식이 없었다. 결국 신 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운명하 였다. 여사는 24일 ‘노조마열차’로 남편의 유 해를 싣고 귀국하였다. 경성역에는 많은 지 인들이 모여들었다. 권동진, 홍명희, 여운형,  신석우, 안재홍, 이관구, 정인보, 원세훈, 김 약수 등이었다. 원세훈은 청주군 낭성까지  함께 동행해주었다. 장례식은 신석우 ·송진 우·여운형·조선일보 방응모·삼천리사 김동완  1,000원 등의 부조금으로 지냈다. 신채호가 세상을 떠난 후 여사는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조국의 독립과 남편의  석방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여사에게 남편 신 채호 선생의 죽음은 극복할 수 없는 큰 상실 이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 후 첫째 아들 수 범은 1941년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 으며, 둘째 아들 두범은 이듬해 운명하고 말 았다. 여사는 1943년 홀로 셋방에 살다가 병 고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자혜의 생애를 다룬 연극 「자혜, 그 누구도 아 닌」(2024년 11월) 포스터(『충청매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