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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박자혜 여사  57 상 전개되었고. 3월 1일부터 서울에 있는 각  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었다. 조선총독 부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여사를 비롯한  한국인 간호원들은 18명이었으며 한국인 남 자 의사로는 내과에 김용채, 산부인과 김달 환, 외과 신창엽, 소아과 권희목, 피부과 김형 익 등이 있었다. 이들은 환자들과 나라 잃은  슬픔을 함께 느꼈다. 여사도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다가 이들을  보면서 민족의 울분을 느꼈다. 간우회 조직과 3·1만세운동 참여 이에 자신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민 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목사 이필주와 연 결되어 동료 조산원, 간호사들과 함께 간우 회(看友會)를 조직하여 각종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였다. 여사는 의사 김형익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 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뜻을 같이한 간 호사들과 함께 3월 10일 만세운동에 동참하 기로 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 었다. 그러나 당시 총독부의원장이 간호사들 의 만세운동에 책임을 진다고 약속하고 유치 소에 수감되어 있던 간호사들을 석방하게 했 다. 덕분에 여사는 풀려날 수 있었지만, 더 이 상 일본인들을 위해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 다는 생각에 병원을 그만두었다. 이후 만주(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지인을  찾아갈 생각으로 병원에 2주간의 휴가를 내 놓고 서울역으로 가서 중국 펑텐행(奉天行)  열차를 탔다. 그는 펑텐에서 동래상회라는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던 우응규를 수소문하 여 찾아가 그에게 국내 정세와 망명을 하게  된 경위를 털어 놓고 도움을 청했다. 우응규 는 박자혜의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십여 일이 지난 후 북경의 명망 있는 인사 에게 연경대학 편입학을 부탁한다는 편지 한  통과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이에 펑텐을 떠 나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그리고 1919년 옌 징대학(燕京大學)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 榮)의 부인 이은숙(李恩淑)의 중매로 역사학 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를 만나 결혼하 게 되었다. 이듬해 첫째 아들 신수범(申秀凡) 을 출산하였다. 1922년 경제적 어려움으로  첫째 아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국내로 돌아와서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산파업으 로 생계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녹록치 않았 다. 국내에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신채호 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국내 인사들 1920년 봄 신채호(오른쪽)와 결혼 직후의 박자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