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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윤세주 선생 57 사하여 「바르샤바 혁명행진곡」의 선율을 붙여 보급시켰고, 나중에는 조선의용대의 노래로 애창되었다. 1938년 6월 초 싱쯔분교 특훈반 졸업 생들을 인솔하고 우창(武昌)으로 이동하 였다. 이들을 토대로 10월 10일 한커우(漢 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될 때 본부 정치조 부조장(副組長) 겸 훈련주 임 직을 맡았다. 10월 하순 광시성(廣西省) 구이린(桂林)으로 철수해서 동장진(東江鎭) 동령가(東靈街)의 사무소에서 집무하였다. 중국 화북에서 일본군과 결전중 전사 1940년 3월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구이린 에서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여, 남안(南岸)지 구 손가화원(孫家花園)에서 조선민족전선 연 맹원들과 함께 거류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 선민족혁명당 제5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 집행위원으로 재선되고, 선전부장을 겸하였 다. 이 무렵, 조선의용대가 동포 다수 거주지 역인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중국공산당 팔 로군(八路軍, 정식 명칭은 국민혁명군 제18 집단군)의 항일근거지인 타이항산(太行山)으 로 들어가 싸울 것을 김원봉에게 강력히 건 의하였고, 9월경부터 제3지대를 충칭으로 이 동 집결시키는 등으로 ‘북상항일’ 준비를 진 행하였다. 중국정부 군사위원회에도 건의하 여, 황허(黃河) 건너의 제24집단군 총사령 팡 빙쉰(龐炳勳) 부대에 배속되는 조건으로 승인 받았다. 1942년 5월 초부터 일본군이 20개 사단, 40만 병력으로 타이항산 항일근거지에 대한 포위공격전을 재개하여 항일근거지를 위협 하하였다. 이에 중국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 과 조선의용대 합동의 기동반격전('반소탕 전')이 개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대 의 40여 명 남녀 비전투원 대오를 인솔하며 이동하던 5월 28일 허베이성(河北省) 써현(涉 縣)의 장자령(庄子嶺)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렸 다. 다른 대원들을 지켜내기 위한 유인질주 를 하다 총상을 입고 동굴에서 5일간 고투하 다 끝내 순국하였다. 1942년 10월 10일 중국 공산당 북방국(北方局) 및 팔로군 야전정치부 주관으로 유해가 수습되어 써현 석문촌(石文 村)의 연화산(蓮花山) 자락에 안장되었다가, 1950년 10월 허베이성 한단시(邯鄲市)의 진 기로예열사능원(晉冀魯豫烈士陵園)으로 옮겨 졌다.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 였다. 중국 현장(허베이성 써현[涉县 ] 석문촌)에 처음 세워진 묘(왼쪽)와 묘비(1950 년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