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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계봉우의 한국사 저술과 독립운동 55 래로 조선을 ‘주신’으로 칭했으며, ‘주신’은 조선보다 오래된 어원으로 청대까지도 불렸다는 논지로 ‘주신 사=조선사’로 인식했다. 그리고 중국사와 비교하며 북간도 및 연해주를 우리의 옛 영토로 이해하고, 한 인의 이 지역으로의 이주가 지리적 인접성만이 아닌 역사적 근원에 있음을 밝혔다. 한국사의 독자적 체계화, 『조선역사』 편찬 계봉우는 1953년 5월 1일, 「敍文(서문)」을 작성하 는 것으로 『조선역사』를 완성했다. 갱지 노트에 빼곡 하게 기록한 한국의 역사는 여러 차례의 정제를 거 쳐 계봉우의 사관으로 편찬됐다. 그는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집필을 시작 으로 국외 한인들의 이주 역사를 기록하여 민족의 통합과 조국의 독립을 목표로 두었다. 사회주의 사 상을 수용한 이후 1932년 『동학당폭동』을 집필하여 ‘계급’을 인식하고 동학을 재해석한 사회주의적 역 사 연구를 진행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3년간의 집필과정을 거쳐 1936년 12월 18일 『조선역사』를 탈고했다. 이로써 유물사관을 적용한 독자적 한국사 체계화를 시도했다고 평가된다. 이는 전도된 식민사 관의 논쟁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항일투쟁이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조국의 해방을 맞은 그는 한국사의 정리가 다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36년간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해방을 쟁취한 ‘반일투쟁사’를 집필하여 1953년 『조선역사』 1 · 2 · 3권을 편찬하며 한국사 연구의 완성을 이루었다. 계봉우의 역사서술은 유물사관에 입각해 시기를 구분하고, 각 시대별로 공구, 경제구조, 사회형태, 계 급적 성분 등으로 정리했다. 특히 기존의 삼국시대 론을 비판하고 가야를 포함한 사국(四國)과 발해 를 지리상 위치에 따른 남북조의 개념을 확립했다. 또 한 발해 건국의 주체를 ‘대조영의 광복군’으로 표현 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현실인식이 투영된 용어 선택 이었다. 이러한 서술은 민족주의적 사관에 더 가깝 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자신의 역사 연구 방법론에 대해 과거 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 확신하면서 계급의 형성, 계급 간 투쟁, 투쟁의 결과가 과거와 현재, 미 래에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연구하는 “일종의 과학” 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재료에 대한 옳은 설명 은 유물론적 역사관이 가르쳐 준다”고 하여 유물론 적 사관의 기술을 피력했다. 민족주의와 유물론적 사관을 결합하여 한국사를 체계화한 계봉우의 역사인식은 당대의 박은식, 신채 호, 백남운 등 두 줄기의 역사가들과 구별되는 그만 의 독자적인 역사 연구의 결과였다. 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북우 계봉우(1880~1959)의 민족운동과 역사서술」 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일대 · 국민대 강사, 안중근의사기념관 · 안성3 · 1 운동기념관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여주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재 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 「구소련 지역 고려인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의 의미와 과제」(『역사와교육』 38집, 역사와교육학회, 2024), 「북우 계봉우의 생애와 활 동에 대한 재고」(『북악사론』, 북악사학회, 2023), 『안성의 독립운동가』(공저, 2017) 등이 있다. 필자 김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