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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5년 6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회(韓國勞兵會) 결성에 참가하였다. 한국노병 회는 독립운동의 장기적 전망아래 10년 동안 에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백 만 원 이상의 전비를 만들어 한국 독립을 도 모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노병회의 교육부원, 노공부원(勞工部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1923년 1월에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는 대한광복단의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1924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의학 전문 지식을 살려 상하이에서 세웅의원을 직 접 경영하는 한편, 1924년 상하이 교민 사회 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인성학교 교사, 교 민단의사회 학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최 석순·문일민·강창제 등과 함께 대통령 이승 만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채원개·김 현구·최석순 등과 더불어 탄핵심판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이때 탄핵심판위원장을 맡았 다. 임시의정원은 심판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3월 23일 이승만 탄핵을 선포하였으며, 만 장일치로 국무총리 박은식을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26년 1월 병인의용대(丙寅 義勇隊) 설립에 동참했다. 병인 의용대는 일제 밀정이나 주구 처단, 일제 관공서 등 일제 기 관의 파괴를 목적으로 결성한 임시정부 직속 의열단체였다. 1926년 9월 15일 자신이 직 접 제작한 시한폭탄을 중국인 서륜쌍(徐倫雙)에게 건네 일본총영사관 폭파 계획을 추진하였고, 대원 최병선과 장진원이 일본영사관에 끌려가자 구출 계획을 추진하 는 한편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강 력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 서남부 쓰촨성에서 병사 1926년 7월 안창호가 제창한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1927년 4월 11일 상하이 삼일당에서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가 성 립할 때 집행위원으로 참가했으며, 흥사단 활동을 지속하였다. 1933년 여름 박창세·강 창제·이수봉 등이 병인의용대를 재건할 때, 다시 상하이를 찾아 1개월간 체재하며 병인 의용대의 부흥에 동참하였다. 이무렵 거처를 중국 서남부의 쓰촨성(泗川省) 만현(萬縣)으 로 옮겨 의원을 경영했는데, 1936년 6월 독 립을 보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정부는 1963 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병인의용대의 일본총영사관 폭파 의거에 대한 당시 신문 보도와 나창헌의 약력 소개 기사(동 아일보, 1926.9.24, 국사편찬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