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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 채문식 선생은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현리에 명문 인천 채씨 가문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 어났다 보수적 전통교육을 받으면서 일제강점에 항거하는 민족 전사는 너욱 견고해졌다. 이러한 우치의 뜻은 산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더욱 굳건해져 후일 선생의 일생에 등의 신념이 되었다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에 진학해서는 사상법으로 함흥 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이 당시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하고 있을 때였다 해방 직우 혼란의 시대에 선생은 민족적 자긍심으로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한 대학생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이끌었고 도도한 웅변기로 내리기국 건국에 빛나는 어전을 세웠다. 건국 후 25세의 젊은 나이로 문경군수기 되어 군청을 정촌으로 이는 조선의 시리적 관점에서 탈피하여 문경의 미래를 위한 소신있는 결단으로 오늘날 문경의 발전을 보면 우치의 뜻을 볼 수 있어 곧이은 선생의 성계 투신은 순탄하지 만은 않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야딩으로서 세 번의 고배를 마셨다! 러한 고난 속에서도 선생을 지행해 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언젠가는 대한민국도 정치적 선진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제8대 국회를 시작으로 6선의 국회의원생활을 하는 동안 선생의 소신은 변함없이 정당의 민주화가 국가의 민주화를 선도해야 하며 오든 정치는 의뢰를 중심으로 미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박정희 대통령도 높이 평가 하였다 이런 면에서 향후 선생의 변신을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의회민주주의의 신봉자인 선생이 국회의장의 중책을 맡은 것은 바로 이런 신념에서였다. 선생은 나아감과 물러성이 분명하여 책임질 일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정계은퇴도 이 소신의 한 단면이다. 선생은 정치적 소신으로 인간관계를 해치는 일이 없었고 인간관계로 인해 정치적 소신을 버리는 일도 없었다 후대들이 반드시 배워야할 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향 문경의 발전을 위한 일에는 적극 나서서 점촌시 승격 경천대 건설 등에 앞장섰었다. 고난과 격동의 시대를 정치민으로 살면서 쉽게 휩쓸리지 않고 항상 합리적 사고를 진지한 선생의 선생의 덕성은 성은 우리가 좋하고 기리 는 이유이며 1990년에 사상 처음으로 열린 남북국회회당 남측 대표단장으로 평양에 다녀온 것도 당해 제일 미더은 의회 지도자 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남긴 족적과 후세에 대한 귀감이 어찌 및 글자의 글로 대신할 수 있으랴만 정치가 대립과 갈등으로 더욱 치닫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선생이 더욱 그리운 것은 대학 동기동창이요 60여년 지기인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2013년 2월일 국회의장(13-15대) 송산 박준규 짓고 롱곡 조용철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