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page
Special Theme • 계봉우의 한국사 저술과 독립운동 53 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한인 교사들도 필요했다. 이때부터 계봉우는 달레네리첸스크로 이동하여 다 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 하바롭 스크 · 스파스크 등지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23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선 봉』의 번역원으로 활동하며, 무신동맹과 언어생활 등에 관한 글을 『선봉』에 연재했다. 특히 전문적인 조선어 연구와 교육에 착수하고 왕성한 집필활동을 펼쳤다. 점차 역사 · 언어 · 민속 · 종교 분야로 연구를 확장하면서 러시아 원동지역에서 한국학 연구의 초 석을 마련했다. 1929년부터 연해주 한인사회의 공산주의 지도자 들에 대한 체포와 숙청이 진행되자 옛 동지들도 그 광풍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에 계봉우는 시골마을 로 들어가 숨죽여 지내면서 정치적인 활동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교육과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37년 한인들의 강제 이주가 결정되자 계봉우와 가족들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이주됐다. 이후 그는 강제 이주와 함께 이전한 고려사범대학에서 조 선어 · 역사 교수로 재직하고, 1940년까지 크질오르 다시 고려중학교에서 고려어 교사로 근무했다. 환갑 의 나이에 접어들자 사회활동보다는 한국학에 대한 연구와 집필에 집념을 보였다. 1959년 타계할 때까 지 남긴 수많은 저작물은 고려인 사회의 민족 정체성 과 삶을 지탱해주고,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한국학을 뿌리내리게 했다.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계봉우 거리’가 만들어져 계속 기억되고 있다. 민족교육을 위한 역사교과서 집필 계봉우의 역사 연구는 민족교육을 위한 교과서를 1936년에 계봉우가 쓴 이력서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 있는 ‘계봉우 거리’ 크질오르다에 있는 계봉우 묘터. 유해는 국내로 봉환됐지만, 흉상 과 묘비는 그대로 남아있다(이상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