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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25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조국광복에 헌신한 순국선열을 다시 본다’ ‘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 소작농  장군, ‘군신’으로까지 불리던 독립전 쟁의 영웅 양세봉! 차별받던 서북지 방의 이주 소작농 출신 청년이 사심  없이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며 조국 독립과 사회개혁, 차별과 불평등 해 소를 위한 반봉건·항일투쟁에 헌신 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울림 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죽으면서 도 “최후의 성공이 있을 때까지 왜적 과 계속 투쟁하라! 조선독립 만세! 조 선혁명 성공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하루하루 안일을 추구하며 그저 바쁜  현실을 살아가기에 급급한 우리가 깊 이 생각해 볼만한 ‘독립전쟁 영웅’의  삶이 아닌가 한다. 1934년 9월 20일 암살돼 1934년 9월 18일 밤, 압록강 건너편, 남 만주 환런현(桓仁縣) 샤오황거우(小荒溝)의 길게 자란 옥수수밭 사잇길을 앞장서 걷던 중국인 사내가 좁은 삼거리 길을 우측으로 돌아 앞장서다가 갑자기 권총을 뽑아들고 뒤돌아서면서 소리쳤다. “나는 과거의 왕밍 판(王明藩)이 아니다, 목숨이 아깝거든 일본 군에 항복하라!” 하지만 조국광복을 위해 반 생을 용전분투하던 뒤 사내는 벽력같은 호 령으로 후안무치한 왕가를 질타할 뿐이었다. 갑자기 수수밭에서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렸다. 뒤따르던 사내는 가슴에 두 발을 맞고 쓰러졌다. 그를 수행하던 독립군 부하들이 옥수수밭을 향해 총을 쏘았지만 스산 한 바람만 불어왔다. 사내는 고통으로 신음하다 하루 반이 지난 9월 20 일 오후 1시 6분에 영웅적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의 장렬한 최후였다. 본명은 양서봉(梁瑞鳳), 이름 그대로 상서로운 봉황이었다. 대부분 평안도에서 건너온 남만주의 한인 교민들은 그를 ‘세봉’이라 불 렀다. 이때 나이는 불과 39세. 그는 1896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 났으나 1917년 남만주 싱징현(興京縣, 지금 신빈현)으로 이주해 농사를 지었다. 조선혁명군은 1929년부터 1938년 말까지 10여 년간 매우 끈질기게 만주(중국 동북지방)를 침략한 일본 침략세력을 상대로 싸웠던 만주 최 후의 독자적 독립군 부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자랑스러 운 독립군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1930년대 전반기 남만주에 존속 했던 한인 교민 자치조직 국민부(國民府)는 사실상의 정부였으며 국민 부와 조선혁명군을 이끌었던 조선혁명당은 핵심적 지도정당이자 여당 구실을 하는 삼위일체의 조직이었다. 조선혁명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해 한국의 절대 독립을 이룬다’는 강령 아래 1929년 말 설립됐다. 1930년대 주로 남만주 지역에서 3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독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1896~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