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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25년 7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인식과 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 1919년 초, 계봉우는 함남 덕원에서 보성전문학 교 학생 강기덕을 만나 만세운동 준비 소식을 들었 다. 그리고 평양의 신학교 입학 수속을 핑계로 영흥 을 벗어나 2월 27일 서울로 갔다. 3월 1일 남대문 거 리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제2차 만세시위를 준 비하던 강기덕의 요청으로 세브란스병원 밀실에서 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다. 3월 3일 고종(광무황제)의 장례식을 보고 평양을 거쳐 영흥으로 돌아왔다. 8월 에 일제의 눈을 피해 원산에서 강우규를 만나고, 최 자남을 소개받아 함께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재망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잠시 머문 그는 북간 도 하마탕으로 가서 가족들과 재회했다. 여기서 중 국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과 철혈광복단장 선임 소 식을 들었다. 11월 26일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의정 원 교통분과 상임위원과 독립운동사 사료수집원으 로 활동했다. 1920년 『사회주의 신수』를 탐독한 그는 점차 사회 주의에 심취해갔다. 이 어 결의형제를 맺은 이 동휘(李東輝)를 비롯한 옛 동지들과 한인사회 당에서 활약했다. 그해 9월 확대 · 개편된 한인 공산당의 러시아 파견 대표로 선정됐다. 9월 23일 상해를 떠나 텐진 (天津)과 베이징(北京),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경유해 러시아 원동지역의 베르흐네우딘스크에 도 착했다. 12월에 러시아공산당 원동부 산하 한인부의 5인 위원에 선출됐으며, 선전선동출판부장에 임명 되어 1921년에 기관지 『노농신보』을 발간했다. 1921년 3월 러시아 원동지역의 또다른 한인 사회 주의 단체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역공으로 반혁명 혐의로 체포돼 임시고려혁명법원에서 5년 징역에 처해졌다. 다행히 12월에 이동휘가 모스크바 에서 펼친 외교활동으로 석방된 계봉우는 다음해 10 월 고려공산당의 중앙간부로 선출됐다. 그리고 치타 의 조선인청년회의 잡지 『새사람』의 주필을 맡았다. 그는 1923년부터 민족 간 분쟁과 분열, 자신의 투옥 사건, 동족상잔의 자유시참변 등을 경험한 상흔과 회한으로 치열했던 사회주의 활동을 중단했다. 교육 · 언론활동과 한국학 연구 러시아의 시베리아 내전 종결 이후 연해주에서는 소비에트체제 건설이 진행됐다. 소련 정부의 교육정 책으로 연해주 한인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와 학생들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기고한 「경성노동회에 대하야」기사(『독립신 문』 1920.5.27, 독립기념관 제공) 1916년 용정의 간도총영사관 당국에 체포돼 재류금지 처분을 받을 때 찍은 사진(동북아역사 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