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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계봉우의 한국사 저술과 독립운동 51 국외 망명 100년, 타계 60년 만인 2019년 4월 22일 국내로 유해가 봉 환된 계봉우(1880~1959). 그는 중 국과 러시아를 주무대로 활동한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ㆍ문학ㆍ민속ㆍ언 론ㆍ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한국 학 연구 선도자였다. 그의 한국사 저 술은 민족주의와 유물론적 사관을 결 합한 독특한 형태로 체계화한 것이었 다. 계봉우의 역사서술은 유물사관에 입각해 시기를 구분하고, 각 시대별 로 공구, 경제구조, 사회형태, 계급적 성분 등으로 정리했다. 특히 기존의 삼국시대론을 비판하고 가야를 포함 한 사국(四國)과 발해를 지리상 위치 에 따른 남북조의 개념을 확립했다. 또한 발해 건국의 주체를 ‘대조영의 광복군’으로 표현한 것은 일제강점기 의 현실인식이 투영된 용어 선택이었 다. 이러한 서술은 민족주의적 사관 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의 길, 마주한 민족운동” 계봉우(桂奉瑀, 호는 北愚 · 필명 뒤바보, 檀 仙, 四方子) 는 1880년 8월 1일 함경남도 영 흥의 관노(官奴)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다. 청 년이 될 때까지 학문에 열중했지만 경제적 가난과 삶의 방황이 점철된 시기를 보냈다. 그의 인생은 26세 때인 『황성신문』에 실린 1905년 을사늑약 소식을 접하면서 전환점 을 맞는다. 민족의 현실을 깨닫고 자손대대 로 독립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이때부터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고, 민중의 계몽을 주창하는 기고문을 발표하며,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에 진력하는 행보를 시작했다. 1906년 10월 고향 영흥에 홍명학교를 열고 조선 역사 · 지리 · 한문을 가르쳤다. 이듬해부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대한협회 · 태극학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 영 역을 넓혀갔다. 이 시기 기독교 신자가 되며 함흥의 기독교계 영생중학 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또한 서북학회 · 신민회 등에도 가입하여 영흥 지역의 유력 인사로서 민족운동을 이어갔다.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1911년 1월 북간도로 망명해 소영자(小營子)의 길동기독학당에서 역사 · 지리 · 수신 · 한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대동협신회의 월간잡지 『대진(大震)』의 주필을 맡고, 비밀단체 인 광복단에도 가입했다. 1913년 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를 맡았고, 한인 자치기관인 권업회의 기관 지 『권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일본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가 1914년 9월 권 업회 해산과 한인 지도자 36명에 대한 추방명령을 내렸다. 계봉우는 가 족들과 함께 중국 왕청현 하마탕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1916년 11월 용정(龍井) 일본영사관에서 파견한 경찰의 급습으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됐다. 이때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영종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하 고, 이후 3년간 영흥에서 거주제한 처분을 받았다. 계봉우(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