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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5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조국광복에 헌신한 순국선열을 다시 본다’ 국민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문화재전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미주한인사회의 한국독립운동』, 『미주한인사회 의  독립운동가』, 『권승렬 평전』, 『일제의 한국농업정책사연구』, 『일왕을 겨눈 독립투사 이봉창』 등이 있다. 필자 김도형 형무소에서 가출옥했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 국내에 있는 민족 주의 단체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평양의 동우회 회원 들과 송태산장에 은거하고 있던 안창호를 체포하였 다. 서울로 압송된 도산은 11월 1일 종로경찰서 유 치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나 12월 24일 위장병과 폐결핵 증세가 심해지면서 보석으로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였다. 도산의 마지막 가는 길 도산의 예언와 운명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이미 자신은 ‘양심’에 따라 살 것이기 때문에 일제의 감옥 에 갇힐 것이라고 말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있던 도산은 1937년 12월 24일 위장병과 폐결핵 증 세가 심해지면서 보석으로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병세는 날로 악화되었 고, 회복하기가 불가능하였다. 안창호가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을 온 사람은 거 의 없었다. 병원의 복도에는 경찰들이 배치되어 출 입을 제한했으며, 병실에는 일본인 간수가 한 사람 배치되어 있었다. 도산을 만나면 일제의 요주의 인 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산이 가장 사랑 하는 동지 이갑(李甲)의 딸, 이정희가 병간호를 했 다. 도산은 병이 너무 깊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도산은 “이불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못 견디 겠구나. 요도 이렇게 딱딱해서 배기고” 하면서 환자 로서 투정을 부렸다. 도산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소식은,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전해졌다. 부인 이혜련은 남편의 안위가 무척 걱정되었다. 도산이 별세하기 이틀 전 인 1938년 3월 8일 혜련은, “병이 그리 침중한 가운 데 위로를 받으시겠는지 무슨 말로 쓸런지 알 수 없 수이다. 이 세상에서 허락하신다면 아무쪼록 병이 낫으시기를 바라나이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병이 속히 낫으시기를 믿습니다”라고 간절한 바램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가 남편에게 보내는 마 지막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편지가 국내에 당 도하였을 때 도산은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안창호는 3월 9일 오후부터 혼수상태에 들어갔고, 도산의 형님 안치호가 밤 8시에 병원에 왔다. 그러나 밤 11시 의사가 도산의 ‘사망선고’를 내렸다. 12시 자정을 알리는 시보가 마지막 ‘땡’하고 칠 그때, 도산 의 숨길이 멎었다. 1938년 3월 10일 병원에서 향년 60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