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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도산 안창호 49 때 갑자기 20여 명의 중국 경찰이 권총을 빼어들 고 뛰어들었다. 이미 밖에는 200여 명의 중국 경 찰들이 무장한 채 포위하고 있었고, 몇 사람은 연 단으로 뛰어올라와 도산을 포박하려 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권총을 차고 다녔는데 이 를 눈치 챈 도산이 충돌을 염려하여 경거망동하 지 말고 조심하라고 하였다. 그날 중국 경찰들에 게 밤을 새워가며 심문을 받았다. 경찰서의 유치 장, 복도와 사무실에까지 꽉 들어차 대혼잡을 이 루었다. 도산과 장소를 빌려준 최명식, 그리고 사 회를 본 김일병 세 사람은 좁은 방에 유치되었다. 다음날부터는 중국 경찰이 아닌 일본 경찰의 심문을 받았다. 도산을 비롯해서 김동삼, 오동진, 현익철, 김이대, 고활신, 유장청, 유기석, 최명식 등 22명이 계속 유치되고 나머지는 곧 석방되었 다. 일본 경찰들이 구금된 42명을 조선총독부에 넘 겨 달라고 했으나, 중국 경찰청은 상부의 지시가 없 다고 미루다가 끝내 거절하였다. 20여 일이 경과되 자 중국 경찰 당국은 도산을 비롯한 한인들의 죄(罪) 가 확실치 않으면 유치를 연장할 수 없고, 또 공산당 이 아닌 독립지사들임을 알고 모두 석방하였다. 국내에서 감옥살이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 직후 도산은 일제에 체포되었다. 의거가 일어 난 이후인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감행되었다. 도산은 윤봉길의 의거가 있는 날, 오후 3시 반경 이유필의 아들 이만 영에게 소년단 기금 2원을 주기 위해 방문했다가 체 포되었다. 윤봉길의거 직후 상하이 일본총영사는 프 랑스조계 당국에 반일 인사에 대한 체포를 요청 했 다. 일본영사관 경찰과 헌병들이 프랑스조계 경찰과 함께 안창호를 비롯한 한국인 11명을 체포하였고, 안창호는 바로 일본영사관에 인계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자 변호사들이 앞을 다투어 도산을 변호한다고 신청했다. 도산은 변호인의 도움을 받기 를 거절했으나, 최소한의 법정 변론만을 하기로 하 고 김병로·양윤식·김용무·신태악·이인·김지건 모두 8 명의 변호사가 맡았다. 안창호는 재판에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생활을 했다.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도산이 일제의 가혹한 감옥에서 생활하기는 정말로 어려웠다. 서대문형무 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수형생활을 하던 도 산은 1934년 2월 1년 감형이 되었다. 그리고 복역중 위장병이 심해져 1935년 2월 10일 2년 반만에 대전 안창호 부고 기사(『조선일보』 1938년 3월 11일자) 안창호 묘소에 심은 꽃 위치를 알 리는 그림(안성결이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1938.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