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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25년 6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의병과 의병정신의 재조명’ 또 이들 외에도 덕유산을 배경으로 장수 · 무주와 경 상도 함양을 넘나들며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문태수, 보성에서 봉기한 머슴 출신 의병장 안규홍 등 수많 은 인물이 의병부대들을 조직하여 호남 각지에서 끈 질긴 항일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각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면서, 경찰 주재소, 헌병분견소 등 을 공격하였고, 더 나아가서 면장 등 식민지적 지방 행정 기구, 재무관리,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 세금 징수자)은 물론이고 일진회원, 헌병보조원, 자위단 원 등 친일세력을 공격하고 처단하는 활동을 벌여나 갔다. 일본군의 공식 통계자료에 의하면, 1908년에 각 도 의병의 전투 상황은 전라남북도의 전국대비 전투 횟수는 25%, 전투의병수는 24.7%를 점하였다. 이러 한 상황은 1909년에 들어서 더욱 늘어나 1909년 상 반기 전라남북도의 전국대비 전투횟수는 47.3%, 전 투의병수는 50.1%를 차지하였다. 이처럼 의병항쟁의 불길이 호남지역에서 크게 번 져나간 것은 척사유림의 기반이 강했던 탓도 있지만 이 지역이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본거지로서 반일 의식이 강한데다, 특히 러일전쟁 전후로 일본인들에 의한 토지 침탈과 경제적 침탈이 극심하였기 때문 이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이곳으 로 진출한 해산군인과 타 의병세력이 호남지역 의병 세력과 합세하였고, 또 지역주민들이 이들을 강력히 지지하고 후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09년 들 어서면부터 호남지역이 명실상부한 의병항쟁의 강 력한 근거지가 되었다. 호남지역에서 의병들의 항일투쟁이 날로 거세지 자, 이곳에 진출해 있던 일본인 지주와 상인들은 일 본 당국에 그 대책을 호소하였고, 일부는 의병들의 공격을 피해 본국으로 철수하기도 하였다. 결국 호 남지역의 의병세력이 조선을 완전 식민화하는 데 장 애가 된다고 판단한 일본 당국은 결국 대규모 군사 작전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이른바 ‘남한 대토벌작전’이었다. 일제측 추산에 따르면 ‘대토벌 작전’ 실시 직전 전라남북도 의병세력의 규모는 주 요 의병장 약 50명을 포함하여 약 4천여 명에 이르 렀다. 일제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의 전개 호남지역 ‘폭도’의 완전소탕을 목표로 한 ‘남한대 토벌작전’은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간에 걸 쳐 실시되었다. 이 군사작전은 당시 대구에 주둔하 고 있던 한국임시파견대 사령부의 계획하에 보병 2 개 연대가 동원되었고, 관할지역의 경찰과 헌병대, 헌병보조원 등이 참여하는 합동작전으로 전개되었 다. 또 해안 봉쇄를 위해서 수뢰정 4척이 파견되었 다. 그 작전계획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❶ 토벌 구역은 전라남북도의 내륙과 연안 도서로 하며, ❷ 전라남북도를 3구역으로 구분하고 3기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토벌을 실시하되, 북에서 남의 방향 으로 진행하여 의병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❸ 토벌지구는 전라남북도를 좌우로 나누어 서북의 좌측 지구는 보병 제1연대가 맡고, 남동의 우측 지구는 보병 제2연대가 맡아 밀집 수색한다. 이 작전은 본래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