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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후기 의병항쟁과 ‘남한대토벌작전’ 47 제에 저항하였다. 이들의 주력은 일본군의 공세를 피 해 가면서 초기에는 경기와 강원지역에서 그리고 강 원 · 충북 · 경북의 삼도 접경지에서 점차 경상도 동남부 지역으로, 그리고 다시 덕유산과 지리산을 잇는 호남 정맥의 산악지대 인근의 호남지역으로 옮겨 갔다. 호남지역에서는 을사늑약 직후부터 유생이 중심 된 의병봉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최익현의 거의 이 후에도 백낙구 등이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양 한규가 남원에서 봉기하였고, 고광순을 중심으로 ‘창평의진’이 결성되었다. 특히 고광순 의병부대는 1907년 봄 화순·능주·동복 등지에서 활동을 벌이다 가 그해 8월 지리산으로 들어가 구례군 연곡사에 근 거지를 마련하고 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같은 해 10 월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여 패전하고 의병장 고광 순은 전사하였다. 또 이들 외에도 양회일, 최산흥(잡 화상), 김동신(의업) 등을 수장으로 하는 많은 의병대 들이 덕유산과 지리산을 배경으로 호남지역에서 활 발한 의병투쟁을 벌였다. 이처럼 호남지역에서 유생 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의병봉기가 활발했던 것은 화 서 이항로와 더불어 19세기 척사위정론의 일가를 이 룬 거유(巨儒) 노사 기정진의 영향이 컸다. 군대해산 이후 호남지역의 의병항쟁은 더욱 치열 해져 갔다. 특히 1907년 9월 기삼연 의병부대(호남 창의회맹소)의 장성 봉기는 이후 호남지역 의병항쟁 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삼연은 기정진의 종질로 기 정진의 손자인 기우만과 더불어 호남 유생들 사이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 중 하나였다. 기삼연이 봉기하자 호남지역 각지 유생들이 몰려와 기삼연 의 병부대에 참여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이들은 호 남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며 활발한 항일전을 벌 여나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삼연은 1908년 1월 일 제에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기삼연 사후 기삼연 의병부대의 참모들은 호남 각 지로 흩어져 새로 의병을 모집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종전보다 더욱 강력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표 적인 인물로는 김용구, 김준 · 김율 형제 등의 의병진 이 있었고, 지역별로는 전북 임실의 이석용, 호남 중 부의 전해산, 호남 서남부의 심남일 등이 그들이다. 1909년 가을 ‘남한대토벌작전’ 시기 및 관할구역 지도(필자 제공)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 중 체포된 호남지역 의병장들의 처형 직 전 모습(OSEN 제공). 뒷줄 왼쪽부터 황두일 · 김원국 · 양진여 · 심남 일 · 전해산 · 안계홍 · 김유길 · 강사문 · 박사화 · 나성화. 앞줄 왼쪽부터  송병운 · 오성술 · 이강산 · 모천년 · 강무경 · 이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