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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25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조국광복에 헌신한 순국선열을 다시 본다’ 국민대표대회의 소집과 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이동휘가 1921년 1월 24일 사퇴하면서 난항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 자 안창호에게 국무총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도 산은 이를 사양하고 국무총리를 거절하였다. 임시정 부는 정국 수습이 불가능해지자 또 다시 안창호에게 총리 대리로 취임할 것을 요청하였다. 안창호는 전 국민의 의견을 결집해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우고 임 시정부를 새로이 개조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 집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21년 5월 12일 노동국총판을 사임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 3일 프랑스조계 미국 인 침례교 예배당에서 개막되어 안창호가 임시의장 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의 두번째 회의는 1 월 9일 대표자격 심사보고 때에 분란이 발생했다. 그 이유는 이승만과 정한경이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했 는데, 그 당시 중앙총회장이 안창호였다는 것이다. 회의 4일째인 1월 11일 회의에서도 안창호의 자격 문제 대한 논란이 거듭되었다. 표결에 부쳐 안창호 의 대표자격을 인정하기로 의결하고 그의 임시의장 사면청원서도 반려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를 둘러싼 참석자들의 견해가 크게 나누어졌다. 임시정부의 헌법과 제도를 고쳐서 모든 일을 진행하자는 ‘개조파’와 새로이 정 부를 조직하자는 ‘창조파’로 대립하였다. 국민대표 회의에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졌고, 임시정부 와의 의견도 달랐다. 도산은 창조파, 개조파, 임시정 부 세 세력을 모아 타협안을 도출하려고 많은 노력 을 하였다. 그런데 창조파가 자신들의 일정대로 밀 고 나가자, 임시정부에서는 내무부령 제1호를 발표 하여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 이로써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임시정부를 개혁하 려는 안창호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1923년 7월 중순 개조파의 입장에 서 있던 안창호가 임시정부 개조를 반대했던 윤기섭·조 완구 등과 한국독립촉진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개 조를 검토하였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 력의 통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미국 동부를 순방한 안창호 도산은 중국에서 1921년부터 3년 정도 임시정부 와 독립운동계를 통일하려 노력했지만 실패로 돌 아가자,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왔다. 그는 192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6년 만에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났다. 도산은 미국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두 달가량 같이 지냈다. 오랜 동안 집을 떠나 미국에 다시 돌아왔지 만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은 없었다. 동포사회와 독립운동을 위해 미주 각지를 순방하고 다녀야만 했 던 것이다. 부인 이혜련으로부터 ‘등한한’ 가장이라 는 책망을 받았다. 그러다가 1925년 4월부터 미국 중부와 동부를 순 방하게 되었다. 1925년 4월 16일 오후 8시 55분 시 카고 정거장에 도착했다. 밤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시카고 7~8명의 한인들이 정거장으로 마중 나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도산을 심방하려고 오는 한인들이 계속 들어왔다. 4월 17일 오후 8시 시 카고 한인학생회에서는 도산을 초청했다. 학생들 뿐 만 아니라, 일반 동포들도 많이 참여했다. 도산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