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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2023년 9월 Special Theme  관동대지진 100주년 특집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의 폭탄 투척계획은 ‘혐의’만 있을 뿐, 아무런 물증이 나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혐의 만으로 ‘대역사건’으로 조작하려 한 것은 조선인학살 의 명분이 필요했던 일본 정부의 절박한 고육책이었 던 것이다. 그러나 박열과 불령사에 의한 조직적 폭동 계획으 로 조작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폭탄 투척계획은 박열과 김중한·가네코 후미코 세 사 람만의 논의 수준에 그쳤을 뿐, 나머지 불령사 회원 들은 전혀 몰랐고 물증 또한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박열도 수차례에 걸쳐 폭탄 유입 계획이 불령사 와 무관함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홍진유와 한현상 등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예심 종결과 함께 1924 년 6월 모두 방면되었던 것이다. 당당히 학살의 책임을 묻고 천황제를 규탄한 박열 의 법정투쟁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검찰에 기소된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검찰과 예심판 사로부터 각각 총 21회와 28회에 걸친 혹심한 신문 을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두 사람은 일본 천황제가 일본 민중과 조선 민족 전체에게 막심한 폐악을 끼치 고 있음을 폭로하고, 폭탄 구입과정도 당당히 밝혔다. 박열은 1925년 5월 3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의 신문에서 자신이 감옥에서 쓴 4편의 문서를 예심판 사 다테마쓰 가이세이(立松懷淸)에게 주었다. 허무주 의자의 전략을 표현한 「음모론」과 일본제국에 대한 박열의 태도를 나타낸 「한 불령선인이 일본의 권력 자계급에게 전한다」, 그리고 「나의 선언」과 「힘들이 지 않고 끊임없이 쓰러뜨리는 론」등이 그것이다. 그 중 「한 불령선인이 일본의 권력자계급에게 전한다」 는 첫머리부터 일본 권력자들에 의한 조선 강제합병 과 간토대학살 등 식민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1926년 1월 재판장에게 일체 자신을 ‘피고’로 부르지 말 것과 조선 예복의 착용, 재판장과 동일한 좌석 마 련, 공판 전에 자신의 선언문 낭독 허용 등 4가지의 조건을 요구했다. 일본 법무 당국은 그의 요구 중 조 선 예복의 착용과 선언문 낭독을 인정했다. 국내 · 외의 비상한 관심과 지원 속에 첫 공판은 1926년 2월 26일 오전 9시부터 도쿄 대심원(大審院) 법정에서 열렸다. 경찰과 헌병 등 180명이 동원된 삼 엄한 경계 속에 열린 이날 공판에서 박열은 조선 예 복과 사모관대를 입고 출두하였고, 이름을 묻는 재판 장에게 “나는 박열이다”라며 반말 투의 조선말로 답 변하였다. 가네코 후미코 역시 흰 저고리에 검은 치 마를 입고 조선 머리로 단장한 채, 당당히 자신을 ‘박 문자(朴文子)’라고 밝혔다. 조선어와 반말 사용으로 재판장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재판장은 6분만에 공개 를 금지시켰고, 이에 항의하는 일본인 동지들과 한인 유학생 원심창(元心昌)·한길(韓吉) 등이 연행되기도 공판장에서의 가네코 후미코(왼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