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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과 역사 인식 45 석주 이상룡은 퇴계학통을 계승한 유 학자이면서 신학문, 즉 서양의 근대 사상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는 민족 이 처한 현실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실천가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전에는 백성을 근대국가의 ‘신민(新 民)’으로 변화시켜 국권을 수호하려 고 하였으며,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 는 ‘독립전쟁론’을 실현하기 위해 자 치기구 경학사 · 부민단 등을 결성하 고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을 양성하 였다. 그러면서 한민족의 새로운 독 립운동 터전인 만주(滿洲)의 역사적  당위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민족 고 대사를 부단히 연구하여 그 정통성을  세웠다. 이는 이상룡이 저술한 『대동 역사』를 통해 신흥무관학교 독립군 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의 역사  인식은 한국근대 사학사에서 1910 년대와 1920년대 민족주의 사학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사의  연구와 저술은 민족운동 의 한 방법이었다. 그래 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틀 로서 역사서를 저술하였 는데, 한국독립운동의  발상지이자 ‘독립운동의  성지’로 평가되는 경북  안동인들도 독립운동 과 정에서 많은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이상룡 · 류인식 · 이 원태이다. 이상룡은 『국사(國史)』와 『대 동역사(大東歷史)』, 류인식은 『대동사 (大東史)』 · 『대동시사(大東詩史)』, 그리 고 이원태는 『배달족강역형세도(倍達 族疆域形勢圖)』와 『채색강역형세도(彩 色疆域形勢圖)』를 저술하였다. 이 역사 서들은 만주 망명과 독립운동을 경험 하며 치열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정 리된 것이다. 그 가운데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한국근대사의 큰 과제 였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역할과 시대 의 소임을 다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를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기 억하고 있다. 더불어 임청각(臨淸閣)과 김우락(부인) · 이준형(아들) · 이병 화(손자) · 허은(손부) · 이상동(동생) · 이봉희(동생) · 이형국(조카) · 이운형 (조카) · 이광민(조카) · 이광국(조카) 등의 가족들도 함께… 이상룡 일가가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할 때 결성한 것으로 보이는  「가족단 명첩(名帖)」(연합뉴스  제공). 명첩 표지에는 '무오(戊午  1918년) 11월 20일 개장(改粧),  경술(庚戌, 1910년) 5월 1일 시 (시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이상룡 등은 1911년 서간도로  이주했다. 1911년 경학사와 신흥강습소가 설립되었던 중국  유하현 삼원포의 추가촌 지역(오마이뉴스 임재근  제공). 지금 신흥강습소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벽돌공장(왼쪽)과 옥수수 밭으로 변해 있다.  오른쪽 산은 경학사가 결성된 대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