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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후기 의병항쟁과 ‘남한대토벌작전’ 45 일본군의 호남지역 ‘폭도(의병을 낮 추어 부르는 말)’ 완전소탕을 목표로 한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은 1909 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남한대토벌’이 종료된 뒤 전국의 의병항쟁은 급속히 퇴조 하기 시작했다. 1904~5년 러일전쟁 과 을사늑약을 계기로 전국에서 거 세게 타올랐던 항일의병항쟁의 불길 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이후 황해도 지역에서 다소 활발한 의병들의 항 쟁이 있었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 다. 1914년 경까지 일부 지역에서 유 격투쟁을 통한 저항이 지속되었지만, 이미 정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 니었다. 결국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 주와 연해주 등지로 이동한 뒤 독립 군으로 변신하여 새로운 독립전쟁을 준비해야만 했다. 대한제국의 군대해산과 의병항쟁 일제의 민황후(민비) 시해 사건(을미사변)과 개화파 정부의 단발령 실시를 계기로 ‘을미의병운동’(1895년)이 일어난 지 9년이 지나서 일본 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1904년 1월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에 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해 2월 개전과 동시,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의정 서’를 강요하고, 이를 근거로 함경도 일대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해 3 월 청일전쟁 이래로 서울, 원산, 부산에 배치한 1개 대대의 한국주차대 조직을 해체하고, 대본영 직속으로 한국주차군 사령부를 편성하여 병 력을 증강하였다. 소위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은 주차사단(수비대)과 주차헌병대를 주병력으로 편성되었다. 이때부터 의병들의 산발적인 저 항이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 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일제가 국 권을 침탈하자 이에 저항하여 의병이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대표적으 로 홍주에서 전 참판 민종식이, 태인에서 척사파(斥邪派) 유생 최익현이 봉기하였다.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평민 출신의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 대가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런데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해산군인들이 이에 저항하면서부터 의 병항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때 많은 해산군인은 일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신식무기를 들고 의병세력에 합류하였다. 군대해산 이후 의병세력은 무장력이 전례없이 강화되어 1907년 11 월에는 일본군과의 교전에 참여한 의병 수가 약 1만 5천여 명에 이르렀 다. 그리고 12월에는 이처럼 강화된 전력을 배경으로 의병들은 이인영 을 총대장으로 한 ‘13도 연합의군’을 결성하여 서울 공격을 시도했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연합의군은 해체되었고, 각 의병부대는 전 국 각지로 흩어져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한편, 일제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군 제12사단을 ‘한국주차 군’으로 조선에 그대로 잔류시키고 주로 한반도 북부를 담당하는 북부 수비관구를 맡게 하였다. 이 사단은 보병 3개 연대, 기병 1개 연대, 야 포병 1개 연대와 공병 1개 연대로 편성되어 있었고, 사단본부는 함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