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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25년 8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조국광복에 헌신한 순국선열을 다시 본다’ 고위원회를 만들자고 하였다. 최고위원회는 한민족 의 대표하는 ‘정치적 통일기관(government)’이라고 했다. 신규식의 통첩을 받은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선정되어 상하이로 갈 준비를 했다. 3·1독립선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배로 부터 벗어나 독립국과 자주민임을 선포하였다. 독립 을 선언하기 전에 상하이로 탈출했던 현순(玄楯)이 미주시간으로 3월 9일 상오 11시경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앞으로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했 다는 것을 전보로 알렸다. 국내에서 3·1독립선언과 같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날지는 안창호도 전 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독립운동이 너무 일찍 일어났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안창호는 중국으로 가서 한국민의 대표기관을 설 립하려고 했는데, 3·1독립선언의 소식을 받은 것이 다. 미주 한인의 최고 지도자로서 도산은 독립선언 이후 미주 한인들의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대 한인국민회의 각 지방회에 국내에서 일어난 독립운 동을 지원하고, 또 한국 독립을 널리 선전하며 일제 의 식민지배를 폭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할 수 있는 자금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미주 각지에 독 립운동 의연금을 모집하게 하고, 미국정부와 의회에 대한 외교활동을 전개하도록 준비하였다. 안창호는 이미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은 백일 규에게 위임하였다. 도산은 미국 관세청의 허가를 받아 4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9일 하와 이 호놀룰루항을 거쳐, 29일 필리핀의 마닐라항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정인과·황진남을 데리고 5월 25일 중국 상하이에 들어갔다. 도산이 상하이에 도착하기 전인 4월 11일 대한민 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도산은 대한민국임 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선임되었고, 임시정부의 수 반인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었다. 도산이 상하이에 도착하자, 비로소 임시정부는 한국민의 대표기관이 며,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기능을 할 수 있게 되 었다.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는 수립했지만, 실질적으로 정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도산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맡 으면서 정부로서의 모습을 점차 갖추게 되었다. 상 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안창호 주도 하에 1919년 9월 ‘대통령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이른바 ‘한성정 부’의 조직안으로 개편하였다. 이로써 노령(露領)의 대한국민의회를 임시의정원과 통합하게 하였고, 노 령을 대표하는 이동휘를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데 리고 올 수 있었다. ‘독립전쟁의 해’ 선포와 독립전쟁 준비 안창호는 1919년 6월 28일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하는 연설에서, “임시정부는 명의(名義)와 정신 적 정부요. 장차 경성에 세울 정부의 그림자외다. 우 리 정부는 혁명당의 본부요, 삼천만은 모두 당원으 로 볼 것이외다. 각기 제 기능 있는 대로 분업하여 독 립을 위하여 일할 것뿐이오”이라고 하였다. 임시정 부가 독립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각자는 자신의 일상에 충실하는 것이 독립운동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