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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과 민족해방운동 41 시대, 삼조선분립시대, 열국쟁웅(列國爭雄)시대로 시 대구분하여 서술하였으며, 총론에서는 삼조선삼한 설과 고구려 900년설 등을 제기하였다. 1924년 베 이징의 관인사(觀音寺)에 들어간 이후 「『삼국지』 동 이열전 교정」, 「평양 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등을 저술하는 등 역 사 연구에 매진하였다. 민중직접혁명론 제창 1920년대 초에는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테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장지락은 이 시기 를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의 전성기라 표현하였다. 이에 공산주의자들은 ‘테러’의 비대중성 · 무모성을 지적하면서 대중에 근거를 둔 투쟁의 필요성을 제기 하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당시 테러활동을 주도 하고 있던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은 신채호에게 ‘테 러활동’을 민족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이론화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의열단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 명선언」을 1923년 1월에 인쇄하여 대량 살포하였 다. 이후 의열단원들은 테러(의열투쟁)를 할 경우 무 기와 함께 「조선혁명선언」을 꼭 휴대하고 다니면서 이를 선전하였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임시정부의 민족해 방운동 방략인 외교론과 준비론의 허구성을 폭로하 면서, 아나키즘에 입각하여 민중직접혁명을 통해 일 본제국주의를 구축해야 한다는 민중직접혁명론을 민족해방운동론으로 정립하였다. 그는 일본제국주 의를 몰아내고 한국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려면, 민 중직접혁명을 통해 민중의 자유가 보장되고 민중이 주인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에 의하면, 민중직접혁명은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 하여 하는 혁명이다. 이는 권력계급 교체에 불과한 정치혁명을 넘어선, 민중들의 직접행동에 의한 사회 혁명의 신채호식 표현이다. 그리고 테러적 직접행동 론을 민족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제시하였다. 즉 일 제 구축과 민중해방 곧 민중직접혁명은 민중의 폭력 적 혁명 즉 ‘테러행위’를 통해 각성된 민중들의 집단 적인 봉기나 폭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1928년 4월에 발표한 「선언문」에서 정 부를 지배계급이 무산 민중으로부터 약탈한 소득을 신채호가 작성한 의열단 선언문 「조선혁명선언」 (1923, 이상 독립기념관 제공) 신채호 저술의 『조선사연구초』(1929) 표지와 목차(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