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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민중문학과 디아스포라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1894 ~ 1938) 선생
선생은 1894년 8월 10일 이곳 충북 진천군 진천읍 백암리 수암 마을에서 태어나 서울 중앙고보와 일본 동경 동양대학 인도철학 윤리학과에서 공부했다. 유학시절(1919~1923,27세) 김우진, 홍해성 등과 한국 최초 연극 연구단체인 '그예술협회'(1920)를 결성한 후 민족극 운동을 펼쳤다. 1921년 김우진, 윤심덕, 홍난포 등과 함께 재일 조선인 '동우회고국순회공연단'의 일원으로 일시 귀국,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 공연(7.9~8.18)했다. 귀국후(29세) 펴낸 '김영일의 사'(1923)는 한국 최초 창작 희곡집으로 고국순회공연 때(1921) 초연돼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듬해 펴낸 시집 '봄 잔디밭 위에'(1924)는 한국 최초의 미발표 창작시집이다. 선생은 31~33세(1924~1926)때까지 조선일보와 시대일보 기자로 활약해다. 32세 때(1925) 사회주의 예술(문학)단체인 '카프'에 참여했고 34세(1927년)에 한국민족민중문학의 기념비적인 단편소설 '낙동강'을 발표했다. 1928년에는 소설집 '낙동강'을 펴낸 후 동토의 땅인 러시아 연해주(구 소련)로 망명1928.8.21). 우수리스크 푸칠로포스카 육성촌에 있는 육성농민청년학교, 조선사범전문학교 교사와 조선사범대 교수로 후학을 기르고 고려인들에게 한글문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국권 회복의 의지를 일깨웠다.
선생은 또 현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망명 문단을 만든 뒤 최초의 망명 문예지인 '노력자의 고향'(1934)과 '노력자의 조국(1937)을 발간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지평을 대륙으로 확장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1937년 9월 18일 추석을 하루 앞둔 범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 탄압정책으로 일본 간첩 협의자에게 협력했다는 누명을 쓰고 KGB에 체포돼 1938년 5월 11일 밤 11시에 총살형을 당했으니, 이 때 선생의 나이 만44세였다. 이후 19년이 지난 1956년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에서 복권이 되었다. 선생이 남긴 식민지 지식인의 치열한 삶과 문학정신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다가올 '조국 광복'과 '통일문학'의 디딤돌이 있었으니, 여기 그 큰 이름과 빛나는 업적을 이 비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