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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5년 7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인식과 독립운동’ 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 토쿠 슈스이가 제창한 ‘암살론’을 수용하여 암살활 동을 민족해방운동의 방도로 채택하였을 뿐, 1916 년까지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해서 민족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혁명을 목격하면 서 점차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사회개조 · 세계개조론 과 결합된 대동사상을 수용하였고, 1919년 3 · 1운동 에서 드러난 민중의 힘을 목격한 이후로는 점차 민 중해방을 표방하는 사회주의에 주목하였다.  신채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 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의 정원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던 이승만을 대통 령으로 선출하자, 그는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였고,  이 때문에 의정원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그는  임시 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외교론과 준비론으로 대표되는 임시정부의 독립 운동노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즘을 민족해 방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신대한 동맹단(단장 남형우, 부단장 신채호)을 조직한 그는  기관지 『신대한(新大韓)』을 통해 임시정부의 운동노 선을 비판하는 한편, 아나키즘을 선전하였다. 임시 정부의 압력으로 『신대한』 발간이 중단되자, 베이징 으로 가서 군사통일촉성회와 통일책진회(統一策進 會) 등을 결성하여 독립군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러 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자, 독립군에 의한 무장 투쟁노선을 포기하고, 테러에 의한 폭력투쟁노선으 로 전환하였다. 그는 순한문지 『천고(天鼓)』를 발행 하여 중국과의 연합전선을 도모하는 한편, 아나키즘 을 선전하였다. 아나키즘을 수용한 신채호는 민족주의적 역사관 에서 탈피하여 아나키즘적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하 거나, 기존의 저술에 대한 수정작업에 들어갔다. 그 는 수정한 『조선사』 총론에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 (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규정했으며, “귀천빈부 각  계급의 압제하며 대항한 사실과 그 성쇠소장(盛衰消 長)의 대세(大勢)”를 『조선사』에 서술할 항목 21개 중 의 하나로 선정하는 등 계급투쟁사관을 제시하였다.  일부만 수정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사』 본문에도 민 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표현들이 여러 군데 나오며,  「조선혁명선언」에서는 이족통치, 특권계급, 경제약 탈제도, 노예적 문화사상 등을 파괴할 것을 주장하 는 등 계급투쟁사관이 더욱 뚜렷해졌다. 신채호는 『조선사』에서 상고사(上古史)를 신수두 신채호의 혁명적 역사관이 반영된 「조선사」의 첫 부분이 실린 『조 선일보』 (1931.6.10., 조선일보 제공). 그는 여기서 역사를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