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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6월30일 월요일 4 (제222호) 특 집 △박수종(서울시노원구) △우진사료공업(서 울시동대문구)△박영록(서울시동작구)△박판 제(서울시 서대문구) △박우봉(서울시 영등포 구) △박금선(서울시 종로구) △박규홍(서울시 송파구)△박용연(서울시양천구)△박병인(인천 시 연수구) △박희중(세종시) △박인철(경기 광 주시) △박석남(경기 구리시) △박성호(경기 성 남시) △박용인(경기 평택시) △박두현(경기 고 양시) △신라오릉보존회경기본부(경기 수원시) △박철식(경기 하남시) △박연희, 박해용, 박정 자(강원 동해시) △박동창(강원 태백시) △박희 영(강원 원주시) △박주선(강원 홍천군) △박기 홍(대전 중구) △박용순(충남 아산시) △박왕야 (충남 천안시) △박광욱(충남 태안군) △박봉순 (충남서천군) △박동근, 박재환(충 북 청주시) △ 박부규(충북 충주시) △박구용(충북 보은군) △ 박기종(충북 옥천군) △박상준, 박세태, 박희렬, 박동기(대구 달서구) △박성용, 박선하(대구 동 구)△박범식,박전,박진하,박원곤(대구수성구) △박세준(대구 군위군) △박형만(부산 사상구) △박남수, 박영덕(부산 수영구) △박정열(부산 영도구) △박청길, 박만순(부산 연제구) △박병 기(울산북구)△박상태(울산울주군)△박외근, 박용진(경북 경주시) △박수환(경북 안동시) △ 박창균(경북 영천시) △박종백(경북 포항시) △ 박복로, 박희범, 박의묵, 박용만(경북 청도군) △박경택(경남 거제시) △박정영, 박순돌, 박부 돌, 박재천, 박미옥, 박희영(경남밀양시)△박채 은(경남 양산시) △박능출, 박문호, 박재헌, 박장 제, 박성국, 박의부, 박용섭, 신원건설(주)(경남 창원시)△박문갑,박기수(경남통영시)△박승제 (경남 남해군) △박갑영(경남 산청군) △박래근 (경남의령군) △박철규, 박동서, 박정주, 박대영, 박상서(경남 함양군) △박중언(경남 합천군) △ 박춘병, 박하온, 박홍문(광주 광산구) △박철주 (전북 남원시) △박병완(전북 김제시) △박점식 (전북 정읍시) △박찬우(전북 전주시) △박종인 (전남 광양시) △박정규(전남 고흥군) △박지현 (전남 나주시) △박종연(전남 순천시) △박행순 (전남 곡성군) △박래호(전남 장성군) △박철환 (전남장흥군)△박승석(제주시) ◎서울시 △박기동(강동구)△박장규(광진구) ◎세종시 △박병은 ◎대구광역시 △박병희(북구) ◎부산광역시 △박순우(강서구) ◎경기도 △박행신(광주시)△박기열(남양주시) ◎강원도 △박복재(태백시) △박재두(동해시) △박기 원(강릉시) ◎경상북도 △박무광, 박정래, 박순대(포항시) △박주식 (영주시) △박명술(영양군) △박시옥, 박인호(예 천군)△박근식(청도군) ◎경상남도 △박광호(거제시) △박용부, 박상기(김해시) △박종해(창원시) △박재현(통영시) △박대순, 박태명(창녕군)△박현옥(남해군) ◎전라북도 △박화석, 박병원(전주시) △박수섭(장수군) △박철용(부안군) ◎전라남도 △박옥만(나주시) △박동현(영암군) △박석 노(무안군) ◎충청북도 △박충규(영동군)△박수용(보은군) ◎충청남도 △박대규(천안시) ◎제주시 △박형래,밀양박씨제주도종친회 △경북 영양군종친회 △종친회 충북본부 후 원에 감사드립니다. ※성손여러분의 후원금은 더좋은신문을만드는데사용됩니다.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함께 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2007년창간이후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변천사등 수 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 작업을하고 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어가는종보’입 니 다.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朴門)의뿌리를연 구 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 동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구독료자동이체계좌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2025년 5월21일에서 2025년 6월20일 입금고객명단 뱚▶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뱜▶지로납부및 농협계좌송금하여주신분 ※△2025년5월28일하나은행으로입금해주신박수성님.△2025년4 월29일농협으로입금해주신최귀례님.△2023년12월4일신한은행 으로입금해주신박재희님.△2023년10월2일우리은행으로입금해 주신이수자님.△2023년3월2일농협으로입금해주신박종식님. △ 2022년6월 21일자 신 한 은행 으로 입 금해 주 신 박기 태님 . △2월24일 국 민은행박중수(화곡동)님.△2월15일자폰카카오로입금해주신박현 규님.△2021년7월2일자E-우리은행한빛신문구독료로입금해주신 고객님.△4월13일자PC신한은행3100로입금해주신고객님께서는 신문사로연락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TEL:(055)352-7224 뱜▶후원하여주신분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5-352-7224,FAX:055-352-7225▶e-mail:parkss1012@hanmail.net 전북 정읍시가 독립운동가 박준승(1866~1927) 선생 기념관 건 립과 현창사업에 적극 나서는 배경에는 박씨정읍시종친회(회장 기섭)역할이지대하다.정읍시종친회는박준승선생묘소를수시 로 찾아 정화사업을 펼치고 광주일보 전북취재본부장이던 현 기 섭회장이지면을 통해알리고지역의 인사들을찾아적극 홍보하 면서박준승선생이정읍의인물로부각되기시작하면서2019년1 1월박준승선생의고택지(地)인근인산외면평사리일대에한옥 기념관이개관되었다. 종친회는 이를 계기로 기념식수와 함께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 하고 이후에도 꾸준히 홍보하고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 은이어졌다.그리고제70회현충일을맞은지난6일청년회(회장, 성호)여성회(회장,월순)종원들이 함께 관내 박준승기념관(정읍 시산외면평사리)을방문하여헌화와함께참배했다.이어기념관 내부를관람한후기섭회장은우리종친자암박준승선생의숭고 한 애국정신과 업적을 이어받고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여 후대 에물려주면좋겠다며참배의 뜻을밝혀 지역종친회가나아갈 길 은 선조 현창사업과 종친들의 애종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어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독립운동가 33인중의 한분인 자암 박준승 선생 을소개해본다. [외세와 봉건 지배층의침탈을 보며 현실 에눈뜨다] 박준승(朴準承)선생은 1866년(丙寅) 11 월24일전라북도임실군청웅면옥석리아 랫배치에서 아버지 박호진 공(公)과 어머 니면천복여사와의사이에셋째아들로출 생한선생의호는자암( 츌 菴)으로15세인1 880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감나무골 삼 요정에서 원암 김영원 선생으로부터 한학 을 수학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던 선생은 20대에 이르러 현실 문제 에 눈뜨기 시작하였다.개항 이후 물밀듯이 몰려드는 외세와 그에 효과적으로대처하지못하고우왕좌왕하는위정자들의모습을보 면서 선생은 점차 우국청년으로 성장하여 갔다.특히 일본과 청국 상인들이 공산품을 가져와비싸게팔고 그대신싼 값으로 미곡을 구입하여대량으로반출하기시작하면서급격히피폐해진농촌의 현실은 선생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양반 지배층은 도탄에 빠진 민생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 급급하였고, 나아가 외세와 결탁하여 일반 민중에 대한수탈을강화하고있었다.농업을생업으로하던선생은그같 은 외세와 봉건 지배층의 침탈을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이를 해결 할 수 있는 반(反)침략, 반(反)봉건의 운동방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시기 그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대민족운동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선각적 양반을 중심으로 중인 지식인과 양인 상공업 자본가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위로부터 의개화,개혁운동이었고,다른하나는일반민중이주체가된밑으 로부터의 혁명운동이었다. 전자의 운동이념이 된 것은 개화사상 이었고,후자의 운동이념이 된 것은 동학사상이었다.그러나 외국 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개화사상은 필연 적으로반(反)외세의문제에취약성을가질수밖에없었으며외세 의 침탈로 궁핍화 현상이 심화되어 일반 민중에게는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제창된 동학사상은 본래 종교이념이었지만, 외세 의 침략이 구체화되고 봉건 지배층의 수탈이 지속적으로 자행되 는 상황에서 그를 극복하려는 사회 변혁이념으로 전화하여 기능 하면서일반민중의폭넓은지지를획득하여갔다. [동학에입교후민족의식고취활동] 1886년선생의나이21세에아버지가별세하자어머니를모시고 청웅면 남산리에 분가하였고, 1890년 스승 김영원을 찾아가 입교 식을올리고동학에입교하게된다. 선생은 민중의 입장에서 반침략, 반봉건의 동학사상에 공감하 게 되었고, 그에 따라 1891년 동학에 입교하였다. 이 시기 동학은 제2대교주최시형의헌신적노력으로교리를정리하는한편전국 적인 포교조직을 구축하여 비약적인 교세확장을 이루어 가고 있 었다.그리하여 이를 기반으로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통한 포교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1892년 전북 삼례와 1893년 충남 보은 등지에 서 대중적인 집회를 개회하여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 다.특히 보은 집회에는 2만여 명의 동학교도가 참여하여 교조 신 원은 물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와 ‘제폭구민(除暴救民)’ 등 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였다.1894년 1월 고부(古阜)민란을 계기 로 동학농민혁명운동이 발발하자, 동학교도이자 농민대중의 한 사람으로선생또한동학농민혁명운동에동참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호남 일대에서 생명을 담보로 투쟁하였지만, 일제의간섭과탄압으로동학농민혁명운동이실패함에따라외세 를몰아내고봉건체제를타파하여자주적근대민족국가를건설하 려던선생의꿈이자당시민중의꿈은좌절되고말았다. 이후 선생은 이른바 ‘동학잔당’을 색출하여 잔혹하게 학살하는 일제와 친일 정권의 촉수를 피해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 온갖 고 초를 겪었지만,결코 사회변혁을지향하는 동학의 끈을 놓지 않았 다.그리하여1897년 전라도 지역의 동학 접주로 선임된 선생은동 학농민혁명운동으로 와해된 포교조직을 재건하고 교세를 만회하 기위하여혼신의정력을쏟아부었다. 1904년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개화운동단체 진보회가 조직되 지만 진보회가 친일단체 일진회로 변질되자 손병희는 동학을 천 도교로개명하고일진회주동자를처단하여사회개혁과민족종교 로서의 정통성을 수호하였다. 이때 선생은 전라도의 유력한 접주 로서 동학의 갑진(甲辰) 개혁 운동시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홈다 리에서 단발(斷髮) 대규모 집회를 주도 해 48일간의 옥중생활을 하였다. 한편 손병희와 박인호를 추종하면서 이용구 일당에 대항 하여교인들을수습하고민족의식을고취하여주권수호운동에앞 장섰다. [천도교전라도순유위원장으로활동] 이후선생은1908년천도교수접주(首接主)가되었고,1912년부 터는전남 장성군천도교대교구장겸전라도순유 위원장으로활 동하였다. 그리고 1916년 선생은 천도교 전라도 도사에 임명되어 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배일사상을 전파하여 갔다.이 같은 선생의 활동은 민족 독립을 염원하는 선생의 의지이기도 하였지 만,이시기천도교교단의뜻이기도하였다.1910년대는일제의무 단정치가 자행되는 암흑과 같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천도교는 각종교리강습회와수련회를개최하여암암리에민족의식을배양 하면서민족의앞날을열어가고있었다.그리하여제1차세계대전 이막바지에이른1916년부터천도교도들을동원하여독립만세시 위운동을일으킬것을교주에게요청하는신도가있었는가하면,1 917년에도같은요청이제기되기도하였다. 특히 1917년 겨울에는 김시학의발의로우선천 도교,기독교,유림3종단 이 연합하고, 사회계와 구관료계의 저명인사들 을포섭한독립운동계획 을추진하기까지하였다. 1918년1월8일미국대통 령윌슨이연두교서에서제1차대전이후강 화원칙의일환으로민 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이들 은중앙학교측의인사들과합세하여독립운동계획을진행시키던 중, 1919년 1월 상순 재일 한국 유학생들이 밀사로 국내에 파견한 송계백으로부터2.8독립선언계획을듣게되었다. 이에 손병희는 “젊은 학생들이 이같이 의거를 감행하려는 이때 에우리선배들로서는좌시할수없다”고하면서독립운동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 을 모색하도록 하였다.이에 기독교,불교계와의 접촉이 이루어져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학생층이 참여하여 민 족대연합전선을 형성함에 따라 3븡1운동 계획은 일원화되어 일사 불란하게추진되었다. 선생은 3븡1운동 계획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인 2월 24일 천도교 전라도도사로서교주손병희에게기도회의종료를보고하고,1월 21일붕어(崩御)한고종황제의국장에참배하기위해상경하였다. 그리하여 다음날 선생은 손병희를 방문한 뒤,이어 천도교중앙총 본부에서권동진을만났다.이때선생은그로부터“총독부에건의 서를 제출하여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나는 본래부 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인 만큼 찬성한다.”라고 주저 없 이 말하면서 3븡1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선생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임예환, 권병덕,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 용환, 홍병기, 양한묵, 이종훈, 이종일 등과 함께 천도교측 민족대 표 15인 가운데 1인으로 선임되어 독립선언서와 독립통보서 등에 서명날인하게되었다. 민족대표33인중1인으로독립선언식참석3월1일오후2시태 화관에서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앞에 놓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한용운이 대표로 “오늘 우리 가 집합한것은조선의 독립을선언하기위한 것으로자못 영광스 러운날이며,우리는민족대표로서이와같은선언을하게되어책 임이중하니,금후공동협심하여조선독립을기도하지않으면안 될것이다”라고하는요지의식사(式辭)를하였고,마지막으로참 석자모두는독립만세를3창함으로써거족적인3.1운동의불을지 폈다. 선생을비롯한민족대표들은출동한일경에게피체되어경무총 감부로 압송되었다.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 “왜 독립운동을 하였 는가” 라는 일경의 질문에, “조선은 4천 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 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독립할운동을하지않으면안된다는것이다.뿐만아니 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회의를 하고 있는 고로 이 좋 은기회에독립하지아니하면 안 될 줄로생각한다.”라고대답하여 항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법정에서 일 본인 판사가 “피고는 조선 독립이 될 줄 믿고 있는가?”라고 묻자, 선생은“그렇게생각하고있다”고거침없이대답하여민족독립에 의확고한신념을분출하였다.나아가일본인판사가“피고는금후 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선생은 “금후 기회만 있으 면 하겠다”고 답변함으로써 불요불굴(不搖不屈)의 독립정신을 드러냈다.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 다. 출감 이후에도 선생은 천도교 최고예우인 종법사(宗法師)에 추대되는 등 교역자로 활동하면서 법정에서 밝힌 대로 재차 독립 운동의기회를모색하다가1927년3월24일전북정읍군산외면정 량리 안계마을 자택에서 염원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61세 의 일기로 영면하여 천도교장으로 정읍군 북면 마정리에 안장되 었다.이에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복 장(대통령장)을추서하였다. 박준승 기념관(朴準承 紀念館)은 3·1운동 당시 천도교를 대표 하여 븮3·1독립선언서븯에 서명한 독립운동가 박준승(1865~1927)의 업적을 기리고,선열의애국애족정신을 후손에게 계승하기 위하 여박준승지사의고택지인근에건립하였다. 정읍시는 2014년 박준승 기념관 조성 사업 추진 계획을 수립하 였다.총23억원의예산을투입하여2018년6월착공하여2019년1 1월 12일 박준승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2023년 3월 15일 정읍시의 회가 븮정읍시 애국지사 박준승 기념관 관리 및 운영 조례안븯을 제 정하였다.박준승기념관앞광장에있는‘애국지사박준승선생상’ 은2019년6월28일건립되었다. 박준승 기념관은 부지 면적 6,045㎡, 건물 연면적 173.88㎡의 전 통한옥형태의건물이다.내부전시시설은박준승의애국애족의 발자취를 따라 환영의 공간,발견의 공간,만남의 공간,감동의 공 간,체험의공간등5개구역으로구성되어있다.각구역마다박준 승 지사의 일대기와 독립운동 활동을 시대별·주제별로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앞 광장에는 박준승 지사의 동상이설치되어 있으며,야 외에는 대형 태극기 게양대, 무궁화동산, 한반도 조경, 휴식 공간, 화장실이있다. 박준승 기념관은 학생들과 관광객들이 3·1운동 및 독립운동 역 사를체험하는공간으로활용되고있다.2020년9월23일산외중학 교와 전북서부보훈지청이 박준승 기념관에 대한 현충 시설 정화 활동, 홍보,안내 등의 결연 업무 협약을 맺었다.박준승 기념관에 서는시설유지및관리,박준승지사에관한자료보존,관리,전시 및 안내,기념관 홍보 물품 제작 및 프로그램 운영 등의 사업을 진 행하고있다. 박씨정읍시종친회박준승기념관찾아 민족대표33인중한분 뱚▲선생의생애 박준승선생 판결문 선생의 묘소 - 1927년 3월 24일 전북 정읍군 산외면 정량리 안계마을 자택 에서61세의일기로 영면하여천도교장으로 정읍군북면마정리에안장되 었다가 1965년 정읍군 민관 합동 사회장으로 현 정읍시 구미동 성황산으 로 이장했다. 뱚▲박준승선생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