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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알리어라. 광주에서는 이미 각 학교의 학생과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함께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교인들은 모두 크게 감동하여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아갔다. 3월 17일에 송주일은 좀더 조직적으로 만세를 부르기 위해 소룡리 청년 조병렬 등과 함께 의논하 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송주일은 그해 4월 11일 광주지법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고, 5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송주일 선생의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장성과 고창은 이웃한 지역이긴 하지만, 장성의 갈재[한자어로 노령(蘆嶺)]를 지나 방장산에서부터 목포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인 영산기맥(榮山岐脈)을 사이에 두고 있어, 전통시대에는 서로 왕래하기 가 그다지 쉽지 않은 곳이었다. 따라서 대도시 광주와 비교적 가까운 장성에서 보다 빨리 만세운동 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성의 소룡리교회는 1905년에 설립되었는데, 오늘날 성광교회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같은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