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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신채호의 한국사 인식과 민족해방운동 37 신채호는 실력양성 그 자체를 목적 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며 ‘선실력양 성 후독립론’을 비판했다. 그는 계몽 사상가에서 민족주의자로, 거기에 서 다시 아나키스트로 사상적 변신 을 거듭하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은 일제의 식 민지 권력이었고, 모든 사회변혁운 동은 바로 일제 식민지 권력의 억압 에서 비롯되었다. 사회변혁을 추구 하던 사람은 모두 민족해방운동가 로서 출발하였으며, 일제가 붕괴되 지 않는 한 민족문제로부터 자유로 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 나 아나키스트도 마찬가지였다. 따 라서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을 주 장하였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민족주 의자로 규정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신채호를 더 이상 민족주의의 틀 내 에 가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신채호 를 아나키스트로 규정할 때 우리나 라 근대 사상계에서 신채호가 차지 하는 비중은 더욱 커질 것이다. 애국계몽운동 전개 신채호(申采浩, 1880~1936, 호는 丹齋)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통해 상당한 유교적 소양을 쌓았으나, 성균관에 입학한 이후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였다.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감옥에 갔다온 이후, 우 리 민족이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판단하에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황성신문』과 『대한 매일신보』 등의 언론을 통해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신채호는 실력양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력양성 그 자체를 목적으 로 삼는 것에는 반대하며 ‘선실력양성 후독립론’을 비판하였다. 학교 설 립, 식산흥리(殖産興利) 등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일 뿐이지 목적지 그 자체는 아니며, 실력이 독립의 일부 대요소(大要素)는 될 수 있을지 라도 부강(富强) 여부가 독립의 전제는 될 수 없고, 오히려 독립이 부강 의 전제가 된다며 독립이 선차적임을 역설하였다. 민족주의사관 정립 신채호는 일본 제국주의의 노골적인 침략에 맞서서 제국주의에 대항 하기 위한 이념으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는 제국주 의를 ‘영토와 국권을 확장하는 주의’로, 민족주의를 ‘타민족의 간섭을 불수(不受)하는 주의로 규정하면서,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민족을 보전 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민족주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민족주의 제창에는 1880년대부터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반제국주의 적 사고체계인 사회주의가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 의의 반제국주의적 측면을 수용하였을 뿐 사회주의 그 자체는 수용하 지 않았다. 신채호는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애국심을 가져야 하 며, 국민의 애국심을 환기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를 정립해야 한다 면서 민족주의에 입각한 역사관을 정립하였다. 그는 자기 민족의 역사 에서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찾을 수 있어야만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긍심 을 가질 수 있다며, 한국 민족의 역사상에 나타났던 영웅들과 그 활동상 을 소개했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서 영웅만이 국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