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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으로 이어지자 1896년 기우만은 일제의 주권침탈에 저항하여 의병을 일으킨다. 박노술은 격서를 써 자신이 의병에 참전할 것을 밝히고 모두가 의병에 가담할 것을 호소하였다. 박노술은 스승 기정진이 설파한 위정척사정신에 따라 외세로부터 조선을 구하자는 민족의식을 갖고, 일제에 대항하여 국권을 수호하는 의병에 참전한다. 향리들이 부당하게 징수한 곡식을 색출하는 등 군량미를 마련하지만,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고종의 명에 따라 기우만의 의병이 해산되자 박노술의 의병활동도 끝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자신이 지은 율리전사(栗里田舍)에서 은거하며 제자를 양성하며 지낸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제는 한일합방의 공로가 있는 을사오적과 대신들에게 은사금을 나눠주며, 전국의 유림들을 회유하기 위해 은사금을 주었다. 일제는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고, 위정척사 사상을 가지고 의병에 가담한 적이 있는 박노술을 회유하기 위해 은사금을 준다. 박노술이 일제의 은사금을 거절하자 일제는 그를 헌병대에 끌고 가 협박하고 가두기도 한다. 하지만 박노술은 죽기를 각오하고 은사금을 받지 않는다. 박노술은 1917년 6월 광주경찰서에 불려갔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사망한다. 출처 : 한국문화원연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