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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박은식의 역사 인식과 독립운동 35 출되었다. 그는 대통령직을 원하지 않았고, 공직에 도 욕심이 없었지만, 독립운동이 무정부 상태에 빠 져 침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그 책 임을 감당했다. 그는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유생’이라 고 겸칭하며, 오직 민족을 위해 한시적으로 직을 수 락했음을 이승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백하였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국무령제를 도입해 임시정부의 체계를 개편하고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선출하여, 질 서 있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박은식의 위대함은 정치적 역할에만 있지 않다. 그는 무엇보다도 독립운동의 사상적 뿌리를 만든 사 학자였다. 『한국통사』에서는 조선 멸망의 원인을 통 렬하게 반성하며 민족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갑신정변부터 3·1운동 에 이르는 항일 투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 는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라 말하며, 국 권은 상실했지만 국혼이 살아 있으면 언젠가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박은식은 평생 민족혼을 일깨우는 일을 자신의 사 명으로 삼았다. 그가 남긴 유언은 이 정신의 총결산 이었다. 그는 죽기 전 안중근의사의 동생 안공근에 게 “독립운동은 통일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 어 떤 방법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당부했다. 계파와 이 념을 넘어 민족 전체의 단결을 요청한 그의 유언은 당시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에 대한 경고이자, 오늘 날까지도 유효한 통합의 메시지다. 1925년 11월 박은식은 상해에서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6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의 죽음은 곧 민족혼이라는, 우리 민족에게 향후 나 아가야 할 지향점이 될 또 다른 정신적 지표가 탄생 하였음을 의미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최초의 국 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민족 전체의 애도 속 에 거행되었고, 이후 그는 민족정신의 상징이자 역 사교육의 등불로 남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62년 박은식에게는 건국훈장이 추서 되었고, 1993년에는 그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지금도 백암학회 등의 활동을 통해 학 술·교육적으로 그의 업적은 계속 계승되고 있으며, 그의 정신 또한 살아 숨 쉬고 있다. 박은식은 역사 속의 한 인물이 아닌, 오늘날 우리 가 되새겨야 할 삶의 표본이다. 그의 생애는 격동의 시기에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자신을 바친 한 지 식인의 고귀한 투쟁사였으며,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되묻는 거울이 다. 우리 역사에서 ‘혼’의 중요성을 강조한 박은식의 정신은,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그 위기를 기회로 전 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희망으로 우리 가슴속에서 살아날 것이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태동 고전연구소를 수료하고 독립기념관에서 근무했다, 순천향대·국립공주대·고려 대 등에서 강사를 역임하고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주 요 논저로 『근대유교개혁론과 유교의 정체성』, 『백년 동안 한국불교에 어떤 일 이 있었을까?』, 「정재 류치명의 현실인식과 대응」, 「석주 이상룡의 현실인식과 대응방략의 변화」, 「서산 김흥락의 이상과 현실 대응」 등이 있다. 현재 한국 근 대유학사와 근현대 불교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필자 김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