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page
Special Theme • 을사늑약(을사5조약)과 의병전쟁 35 불러 조약을 강요하였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 에 찬성하도록 원로대신 심상훈과 여러 대신들을 협 박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하 여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 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조약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으면서도 대세상 불가피한 것으로 여 겼다고 한다. 17일에는 덕수궁 수옥헌(漱玉軒, 현 중명전)에서 조약 가부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때 하 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거느리는 일본군이 완전무장을 한 채 궁궐 안팎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 었으며, 본회의장인 궁내에도 착검한 헌병경찰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오후 3시에 시작되어 밤 8시까 지 계속된 이 회의에서는 조약에 찬성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에 하야시는 이토와 하세가와를 다시 불러들여 대신들을 강제로 재소집하여 회의를 재개토록 하여 이튿날 오전 12시 30분까지 대신들 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조약의 체결을 강요 하였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마침내 을사5 적의 찬성을 받아낸 이토와 하야시는 고종황제의 윤 허도 받지 않고 스스로 대한제국 외부(外部)의 도장 을 탈취하여 조약문에 멋대로 조인하였다. 그러므로 을사늑약은 일제가 폭압적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 운데 찬성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통치권자인 고종황제의 승인과 서명, 그리고 국새의 날인을 받 지 않은 명백한 불법조약이었던 것이다. 이하영은 끝까지 불가를 주장하였고, 나머지 학부 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적’은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미루면서도 찬의 를 표 하였다. 을사늑약의 늑결로 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 고 일본의 이른바 ‘보호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로 인해 한국민은 격분하였으며, 중기의병으로 떨쳐 일어나 거족적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을사늑약에 대한 항쟁 1905년 11월 말 을사늑약의 늑결 소식을 국내 각 지로 신속히 전하면서 전국의 항일투쟁을 선도한 것 을사늑약 조약문(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 日也放聲大哭)」(국립중앙도서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