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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5년 7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인식과 독립운동’ 를 인간 사회의 궁극적 원리로 받아들이는 데는 비 판적이었다. 그는 유교의 이상사회인 대동사회(大同 社會)를 지향했다. 대동사회는 신분과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로,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약자도 보 호받는 세상이다. 박은식은 경쟁이 치열할수록 오히 려 평등과 평화에 대한 열망이 커질 것이라 보았다. 박은식은 주자학이 변화된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 다고 보고, 양명학의 실천성과 시대적 유연성을 높 이 평가했다. 양명학은 ‘마음이 곧 진리’라는 ‘심즉리 (心則理)’를 강조하며, 인간의 ‘양지(良知)’를 바탕으 로 시대와 상황에 맞게 행동할 것을 주장한다. 박은 식은 이러한 실천적 학문을 통해 시대 과제를 해결 하고자 했다. 그는 전통 유학에서 출발해 서구 사상 과 사회진화론, 실학, 양명학 등 다양한 사상을 수용 하였다. 그는 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를 넘어서 모 두가 더불어 잘 사는 대동사회, 평화와 정의가 실현 되는 사회를 꿈꾸었으며,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 학문과 실천에 힘썼다. 서울로 상경하여  세계 정세에 눈을 뜬 그는 애국계몽사상가로 변신하 여 장지연·유근·남궁억 등이 『대한황성신문』을  인수 하여 『황성신문』으로 간행하자 장지연과 함께 주필 로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언론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 취시키는 논설들을 집필하면서 『학규신론(學規新 論)』을 간행하여 유교개혁과 의무교육·사범교육·여 자교육·실업교육 등 신교육사상 수용의 필요성을 역 설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 연은 이 조약의 부당성은 논하는 「시일야방성대곡」 을 『황성신문』에 게재하였다. 이 논설의 발표로 『황 성신문』은 무기정간되고 장지연은 구속되었다. 상황 이 이렇게 되자 박은식은 대한매일신보사로 자리를  옮겨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대한매일신보』 에 다시 싣는 등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1910년 8월 국권이 상실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 되어 모든 언론기관이 폐쇄되자 박은식은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4월 부인 연안 차씨 가 세상을 떠나자 5월 국경을 넘어 만주(중국 동북지 방) 서간도로 망명하여, 환인현 흥도구의 대종교 시 박은식이 서간도의 동창학교에 재직할 때인 1911 년 발간한 『발해태조 건국지』(뉴스1 제공). 서간도  신빈현(흥경현)의 흥동학교 교재로 사용한 것이다.  박은식 사진 박은식 초상화(국가보훈부 제공)